유희춘이 첫 지방관으로 있던 곳, 무장읍성

정윤섭 2021. 7. 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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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일기'와 함께 떠나는 조선사림의 꿈과 일상⑩

[정윤섭 기자]

미암 유희춘의 관직 진출과 관료 생활

16세기 사림 시대에 지방에서 힘을 기른 재지사족들이 제도권 정치에 편입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과거시험을 통해서였다. 과거제는 학문을 통해 실력 있는 관리들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으로 사림들에게는 자신의 학문적 능력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사림들은 이처럼 대부분 지방에서 실력을 갖추어 과거를 통해 중앙의 관료로 진출한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미암 유희춘 역시 조선의 변방인 해남에서 태어나 관료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같은 과거제 덕분이기도 하였다.

미암은 해남에서 태어나 9세 때부터 부친 유계린으로부터 '통감'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계린은 김굉필뿐만 아니라 장인인 최부에게도 학문을 배워 경전에도 박식하였으며 30세 이후에는 두문불출하고 향촌에서 자식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온 힘을 기울였다.

유계린은 이렇게 관직에 진출하지 않고 오직 자녀들의 교육만을 위해 온 힘을 기울인 덕에 큰아들 유성춘은 비록 젊은 나이에 죽기는 하였지만 호남3걸 중에 한명이라 일컬을 만큼 학문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작은아들 유희춘 역시 이같은 가학의 분위기 속에서 자연히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다.

미암은 이렇게 집안에서는 아버지로부터 일찍부터 소학을 바탕으로 한 학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후 김안국과 최산두 등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미암은 1538년 26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관문을 통과한다. 그리고 1544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그 뒤 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

미암은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19년간 유배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비교적 순탄한 관료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의 관료생활은 유배생활을 전후로 하여 구분할 수 있는데, 유배 이전은 별시문과에 합격하여 1542년 세자시강원 등을 거쳐 지방관으로 나아가 전라도 무장현의 현감을 거치는 시기다.

미암의 관료 생활은 16세기 사림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관직 진출과 사화로 인한 유배생활, 그리고 관직의 복귀, 또다시 낙향으로 반복되는 모습은 당시 사림들의 일상이 어떠했는지를 짐작 할 수 있게 해준다.

서해 연안의 방어처 무장읍성
 
▲ 무장읍성 객사 미암 유희춘이 지방관으로 있었던 곳으로 서해연안의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객사와 주변의 오래된 고목이 잘 어우러진 읍성이다.
ⓒ 정윤섭
 
전라북도 고창에는 미암이 첫 지방관으로 있었던 무장읍성(사적 346호)이 있다. 이곳은 현재 고창군 무장면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서해연안 지역을 방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무장현으로 현감이 파견되었다. 무장현은 고려시대까지는 무송(茂松)과 장사(長沙) 두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효과적인 왜구 방어를 위해 1417년(태종17) 두 고을의 첫자를 따서 무장이라 하였다.
2001년부터 시작된 무장읍성 복원으로 인해 읍성 안에는 객사를 중심으로 현감이 정무를 보던 동헌, 읍성의 정문인 진무루, 누각 건물인 읍취루와 연못도 좌우로 하나씩 잘 복원되어 있다.
 
▲ 무장읍성 읍취루 읍성안의 누각건물로 이곳에서 관청의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도 베풀었다고 한다.
ⓒ 정윤섭
 
객사를 비롯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는 읍취루도 인상적이다. 이곳에서 관청의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도 베풀었다고 한다. 웅장한 객사 건물을 중앙으로 하여 주변에 수백년된 노거수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어 옛 객사 건축의 전통미와 자연미가 잘 어우러진다. 

전라도 무장현은 평소에 다스리기 어려운 고을이었다고 한다. 바다가 가까워 사람들의 기질이 거칠고 왜구의 침략도 염려되었기 때문 같다. 미암은 무장현감으로 있는 동안 근면하고 민첩하였으며 몸소 양로연(養老宴)을 베풀고 명목 없는 세금 징수를 폐지하여 온 고을이 한마음으로 따랐다고 한다. 첫 부임지의 목민관으로서는 나름 인정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무장읍성은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군이 맨 처음 봉기하였던 곳이기도 하다. 역사의 굽이마다 이곳에서 외쳤을 그 함성이 새삼 느껴져 온다.

사림들의 교유처 선운사 도솔암

미암은 무장현에서 현감으로 있는 동안 인근의 사림들과 자주 교유를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같은 교유를 짐작하게 해주는 흔적이 선운사 도솔암의 천인암 암벽에 새겨진 글씨다. 암각은 왔다간 것을 기념하여 새긴 것으로 삼선생유상(三先生遊賞)이란 제목 글씨 아래에 미암 유희춘, 하서 김인후, 복재 기준 세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선운사 도솔암 천인암 암벽에 새겨진 미암 미암 유희춘과 하서 김인후 등 사림들이 이곳에 왔음을 알 수 있다.
ⓒ 정윤섭
 
하서는 미암과 아주 절친한 사이였으며, 복재는 미암과 젊어서 동문수학하였다고 하여 미암이 무장현감으로 있을 때 서로 교유하였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바위에 각을 한 것은 하서 김인후의 아들 김길중이었다고 한다.

이들이 선운사에 들른 이유는 무엇일까. 산경이 뛰어난 도솔암에 유람차 왔을 것으로도 보이지만 당시 사림들의 불가와의 교류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미암이 살았던 조선 중기 무렵은 숭유억불 정책이 뿌리내려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선운사는 유학자들과 고승들의 교유가 자주 이어졌던 것을 알 수 있다.

미암의 돈독한 친구이자 호남시단을 이끌었던 김인후가 승려들의 시축 말미에 제발(題跋)을 쓴 것을 보면 스님들과의 교류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동학혁명군의 염원 서린 마애불
 
▲ 도솔암 내원궁 천인암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나타난다. 무념무상의 개한마리가 지키고 있다.
ⓒ 정윤섭
 
이곳 천인암 암벽 정상에는 도솔암 내원궁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으로 올라가는 듯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도솔암 내원궁이 나온다. 잿빛 개 한 마리가 스님의 독경 소리에 무념무상으로 엎드려 있다.
이 바위 아래쪽 암벽에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13미터 높이의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보물 1200호)이 조각되어 있다. 거친 암벽에 조각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세련된 조형미는 느끼기 어렵지만 거대한 암벽에 어떤 방법으로 조각을 하였을지 궁금해진다.
 
▲ 선운사 도설암 마애불 동학혁명때 손화중이 마애불의 가슴에 있던 비기를 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정윤섭
 
이 마애불은 동학 농민혁명 때 가슴의 복장에서 배꼽에 숨겨져 있는 비기(秘記)를 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당시 고창 일대에서 민심을 장악한 손화중이 마애불의 배꼽에 숨겨져 있는 비기를 꺼냈다는 것으로 마애불의 배꼽 자리에는 오랫동안 내려오는 풍수도참의 예언이 숨겨져 있었다. 마애불의 비기를 꺼내면 운이 다한 한양 정부가 망한다는 예언이 전해온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동학혁명군의 염원이 들어있다. 이같은 염원 때문인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의 발화 지점이 이 마애불 앞에서였다고 말하고 있다. 당시 동학혁명군이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한 것을 볼 때 이 땅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간절한 염원이 서려 있는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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