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종선의 올드무비㊿] 잊을 수 없는 이름 젤소미나, '길'
어린 시절 즐겨봤던 ‘명화극장’에서 자주 만났던 안소니 퀸은 연기파 배우의 대명사였다. 알랭 들롱의 조각 같은 얼굴과 다른 선 굵은 남성미와 커다란 체격에 인생의 페이소스를 깊게 표현했던 그에게 시대는 거칠고 강한 마초 이미지의 사내를 종종 맡겼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을 거장의 반열에 오르게 한 영화 ‘길’(1957)도 그랬다.
굵은 쇠사슬을 가슴에 두르고 허파의 힘으로 끊는 차력사 잠파노(안소니 퀸 분). 마을에서 마을을 전전하며 차력쇼를 보여주고 얻은 돈으로 살아가는 사내다. 없을 땐 입에 풀칠하고, 공연으로 돈을 번 날이면 술에 음식에 여자에 진탕 빠져 탕진한다.
잠파노는 음식 준비를 하고 공연 보조로 북을 치고 춤을 출 조수를 곁에 둔다. 아내로 부르며 성을 착취하면서도 수중에 돈이 생기면, 과부 남편의 옷을 얻을 요량이면 언제든 다른 여자에게로 간다. 옆에 있는 여자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고, 조심스레 문제를 제기하려 하면 “나랑 살고 싶으면 하나 알아둘 게 있어. 입 좀 닥쳐!”라고 소리친다.
영화는 잠파노가 가난한 집의 둘째 딸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 분)를 1만 리라에 사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언니 로사를 먼저 조수로 데려갔는데 죽었단다. 젤소미나가 동생들을 데리고 바다로 놀러 간 새 이미 엄마와 잠파노의 ‘거래’는 끝나 있다.
잠파노가 준 돈으로 집 지붕도 고치고 동생들에게 음식도 먹이고, 입 하나도 덜고 얼마나 좋으냐며 등을 떠미는 엄마. “내 딸이 어디에 묻혔는지 나는 가볼 수도 없다”고 눈물지으면서도, 인간애나 윤리보다 먹고사는 게 바빠 젤소미나를 또 잠파노에게 내준 것이다. 어떤 일을 당했기에 로사가 죽었을지 짐작하면서도, 젤소미나가 착하다 못해 좀 모자라 ‘아픈 손가락’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향을 떠나 뭐라도 할 수 있는 바깥세상으로 딸을 보낸다.
젤소미나는 잠파노의 아내이자 조수로 노예처럼 부림 당한다. 착한 젤소미나는 궁금하다, 로사 언니에게도 이렇게 했을까. 음식도 못 하고 쓸모없는 나여서 이리 대하는 걸까. 고된 유랑생활 속에 젤소미나는 피에로 분장하고 북치고 춤추는 건 좋은데, 잠파노가 싫어서 도망친다. 아무리 감정 표현에 서툰 젤소미나지만,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망친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 고향이 어느 쪽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무작정 길을 나선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힌다. 잠파노는 이후 지라페 유랑극단에 합류해 차력쇼를 이어가는데, 젤소미나는 도망쳤을 때 로마에서 봤던 공중곡예사 마또(리차드 베이스하트 분)과의 재회가 반갑다. 마또는 젤소미나에게 나팔 연주를 가르치고 함께 일하자고 제안도 한다. 잠파노는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자신을 놀려대는 마또가 싫고, 젤소미나와 가까운 것도 싫다. 잠파노는 마또를 죽이겠다고 덤비고, 칼을 들고 난동을 부린 바람에 경찰에 연행된다.
극단 사람들은 젤소미나에게 자신들과 떠나자고 하고, 마또 역시 자신과 일하자고 다시 말한다. 하지만 주저하는 젤소미나. 고단한 유랑생활 속에 젤소미나는 잠파노의 고된 인생이 보이고 그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 젤소미나를 보며 마또는 태도를 바꿔 잠파노의 표현 방법은 틀렸지만 너를 좋아하는 걸 거라고, 그래서 분노한 걸 거라면서 잠파노 곁에 있어 주라고 말한다. 마또의 말은 젤소미나가 원하는 말이었다. ‘정말 나를 좋아하려나…’. 그렇게 젤소미나는 잠파노를 떠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잡지 못한다.
다시 둘만의 유랑을 시작한 젤소미나와 잠파노. 추운 겨울 어느 날, 이동 수단이자 집이자 공연 물품 창고인 잠파노의 오토바이 짐차에 기름이 떨어져 간다. 마침 산길을 태워 준 수녀의 도움으로 수도원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는데. 수녀 대신 땔감을 패 주던 잠파노는 온데간데없이 은장식을 훔치려 시도하고 이를 말리는 젤소미나에게 도둑질을 강요한다. 크게 실망한 젤소미나의 어두운 표정, 다음날 배웅하던 수녀가 표정을 읽고 수녀원에 남아도 좋다고 제안한다. “누가 그의 곁에 있겠어요”, 세 번째 기회 역시 잡지 않는 젤소미나다.
젤소미나의 마음을 잠파노가 알기를 바랐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곁에 남아주는 젤소미나를 아끼는 마음이 생기기를 기대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자신을 사랑하는 젤소미나의 마음을 알기를 바랐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력이고, 고독한 인생길에 누구보다 외로운 두 사람이 서로를 의지해 살기를 바랐다. 붙잡는 수녀의 손을 마다하는 젤소미나, 자신의 죌ㄹ 알리지 않는 젤소미나를 바라보는 잠파노를 보며 희망을 품었는지 모르겠다.
비극은 바로 그런 순간에 온다. 그런 희망은 헛된 것이라고 명확하게 선을 긋듯이 그렇게 잔인하게 온다. 하필, 정말이지 하필, 두 사람의 앞길에 마또와 그의 고장 난 차가 놓여 있다. 잠파노만 보면 발동하는 마또의 장난기는 어김없이 발동하고, 잠파노의 파괴력 강한 주먹도 여지없이 날아간다. 죽일 생각은 없었고, 죽을 줄 몰랐는데 마또가 쓰러진다.
젤소미나는 너무나 큰 충격에 열흘을 몸져눕는다. 먹지도 못한다. 마또가 누구인가, 자신에게 잠파노 곁에 있어 주라고 말한 사람이다. 잠파노의 오토바이 짐차를 그가 갇혀 있는 경찰서 앞에 젤소미나를 태워 데려다준 사람이다. 잠파노는 고마워하기는커녕 모든 일을 그르쳤다. 젤소미나가 세상에 대한 마음의 끈을 놓은 것은 바로 그런 잠파노 때문이었다.
열흘 만에 몸을 일으킨 젤소미나에게 음식을 주고 이불을 덮어주는 잠파노. 이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린 것인가 싶었는데…, 그는 도망친다. 이제 자신에게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만 되는 젤소미나를 길 위에 놓고 도망친다. 그의 마지막 양심은 이불자락 아래 찔러둔 몇 푼의 돈이다.
시간은 훌쩍 흘러, 최강 체력 잠파노의 차력쇼에 에너지가 부족해 보인다. 유랑극단과 함께 세상을 떠도는 잠파노. 공연이 끝나고 술집에서 쫓겨날 만큼 술을 마신 잠파노는 진저리를 치는 동료를 먼저 보내고 마을 길을 걷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에 익은 가락. 빨래 너는 여인의 허밍이다. 젤소미나가 비 오는 날 들려왔다며 나팔로 불곤 하던 그 곡(‘전쟁과 평화’ ‘태양은 가득히’ ‘달콤한 인생’ ‘로미오와 줄리엣’ ‘대부’ 시리즈 주제곡으로 유명한 영화음악의 거장 니노 로타가 작곡한 젤소미나의 테마곡)이다.
여인은 전한다. 4~5년쯤 전에 유랑극단과 함께 왔던 여인이 바닷가에 쓰러져 아버지가 데려왔는데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뭘 먹지도 하지도 않던 여인은 세상을 떠났다. 연고를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했다. 잠파노는 젤소미나가 발견됐을 바닷가로 발길을 옮긴다.
그리고 통곡한다. 그 통곡에서 젤소미나 부재의 시간 동안 깨달은 젤소미나의 마음, 아니 젤소미나를 향한 잠파노의 마음이 읽힌다. 세상 누구도 제대로 어울려주지 않는 외로운 차력사 잠파노를 향한 젤소미나의 연민과 사랑, 세상 누구도 발견해 주지 않은 자신을 아껴준 젤소미나를 향한 그리움과 사랑.
이 마지막 한 장면으로 잠파노의 못난 행동들은 파도에 쓸려가고 뒤늦은 깨달음에 뼈아픈 후회의 나날을 보내왔을 남자가 보인다. 그 회한의 통곡에 의해 젤소미나의 순수함은 영원으로 살아온다. 그걸 가능하게 한 게 안소니 퀸의 힘이고 명배우의 존재 이유다.
안소니 퀸에 명연에 의해 잠파노의 가슴엔 젤소미나의 이름이 새겨졌고, 우리의 마음에도 잊지 못할 이름이 하나 자리 잡았다. 순수해서 더욱 깊은 사랑의 대명사, ‘젤소미나’이다.
Copyright ©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홍종선의 명대사⑫] 시간은 명백한 악의를 가지고 '초속 5센티미터'로 흐른다
- [홍종선의 캐릭터탐구⑬] ‘해고 전담’ 문소리 VS ‘가전 전문’ 정재영 (미치지 않고서야)
- [홍종선의 메모리즈㊳] “발신제한 하드캐리” 조우진의 인물대사전
- [홍종선의 메모리즈㊴] 명배우들의 격투법…‘모가디슈 ‘순두부 터치’ VS 추격자 ‘개싸움’
- [홍종선의 올드무비㊾] ‘피아노의 숲’을 새삼 낯설게 한 2가지
- 한동훈 "이재명, 판사 겁박…최악의 양형 사유"
- '협력 사무국' 출범한 한미일, 공조 강화…그럼에도 관건은 '트럼프 2기'
- 빗속에서 집회 나선 이재명 "이재명 펄펄하게 살아서 인사드린다" (종합)
- 클리셰 뒤집고, 비주류 강조…서바이벌 예능들도 ‘생존 경쟁’ [D:방송 뷰]
- '승점20' 흥국생명 이어 현대건설도 7연승 질주…24일 맞대결 기대 고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