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세상에 없던 올림픽

김철오 2021. 7. 24.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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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오 문화스포츠레저부기자


미터기에 표시된 택시요금이 4000엔을 넘어가자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도쿄의 택시 요금이 비싸다는 말은 출장 전부터 숱하게 들었지만, 우리 돈으로 4만원을 넘는다면 일본에서도 작지 않은 금액인 게 분명하다. 택시를 탄 곳에서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그만큼 멀지도 않았다.

“목적지와 다른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일본인 택시기사에게 영어로 말을 건넸다. 백미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표정이 굳었다. 택시는 막 고가도로로 진입한 뒤였다. 당장 택시를 세울 수도, 방향을 바꿀 수도 없었다. “차량을 세울 곳을 찾겠습니다.” 택시기사가 영어로 응답했다.

정신을 차리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택시가 정확한 목적지로 가고 있으면 어쩌지?’ 일본어만 나열된 택시기사의 내비게이션을 흘끗 봐서는 어느 목적지로 향하는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허둥지둥 스마트폰의 지도 애플리케이션(앱)을 켰다.

‘아차! 와이파이가 먼저야.’ 국내 이동통신사의 해외 로밍 데이터를 이용해 이것저것 검색하고 접속했다가는 요금 폭탄을 맞을 게 뻔했다. 출장을 앞두고 미리 준비해온 일본 여행용 무선 인터넷 접속 단말기 전원부터 켰다. 단말기를 실행하는 동안에도 택시는 달렸고, 미터기는 부지런하게 돌아갔다. 어느덧 요금은 4300엔으로 늘었다. 무선 인터넷이 연결됐다. 이제 지도 앱을 확인할 차례다. 원래의 목적지와 현재 위치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택시가 엉뚱한 목적지로 가는 게 확인됐다.

택시기사가 고가도로를 빠져 나와 차량을 세운 곳은 어느 호텔 앞. ‘이케부쿠로’란 지명이 호텔 간판에 적혀 있었다. 이케부쿠로는 도쿄타워를 기준으로 북서쪽에 있는 번화가다. 원래 목적지는 도쿄타워 남동쪽 연안에 조성된 니시카사이 지역의 호텔이었다.

택시기사에게 지도 앱을 보여주고 목적지를 잘못 찾아온 사실을 알려줬다. 택시기사는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려 연신 사과한 뒤 원래의 목적지로 출발했다. 방향을 바꿔 도쿄 도심을 다시 한번 가로질렀다. 숙박할 호텔로 도착했을 때 미터기에 표시된 요금은 1만1300엔. 우리 돈으로 약 12만원에 해당한다. 도쿄에서 조금 허름한 호텔을 찾으면 하루를 묵을 수 있는 금액이다.

도쿄올림픽 출장 계획에서 하루치 숙박비를 택시비로 날리는 시나리오는 없었다. 지난 5월부터 두 달간 도쿄올림픽 조직위원회와 100회 이상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수십 장의 서류를 일본으로 보낸 준비 과정의 고단함에도 제법 촘촘하게 세웠다고 생각했던 출장 계획은 지난 19일 일본으로 입국해 공항을 빠져나온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렇게 틀어졌다.

다행히 이 요금을 지불할 일은 없었다. 요금을 내는 건 올림픽 조직위다. 올림픽 조직위는 해외 참가자의 입국 당일 첫 번째 택시를 무상으로 제공한다. 해외 참가자 중 취재진은 공항에서 일제히 미디어 전용 버스를 타고 도쿄 니혼바시하코자키의 대중교통 환승 터미널인 ‘티캣(T-CAT)’이라는 이름의 시설로 집결한다. 이곳에서 택시를 나눠 타고 각자의 호텔로 이동하는데, 거리와 상관없이 그 비용 전액은 올림픽 조직위 예산에서 빠져나간다.

올림픽 조직위가 이 돈을 부담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다. 공항에서 다른 길로 새지 말고 각자의 호텔로 직행해 자가격리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올림픽 기간 중 일본으로 들어올 해외 참가자는 선수들을 포함해 8만명으로 추산된다. 그 많은 인원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올림픽 조직위는 공항 입국장에서 호텔 객실까지 동선의 빈틈을 무료 택시로 연결해 대회 초반 방역 대책을 완성했다.

문제는 계획을 무력화하는 방법의 허술함에 있다. 서류에만 집착하는 일본의 ‘아날로그 행정’은 방역 대책에 균열을 낼 위험 요소로 존재한다. 방역 첫 단계인 무료 택시가 그렇다. 티캣의 안내요원은 해외 취재진의 호텔 주소를 일일이 수기한 종이를 택시기사에게 건넨다. 택시기사는 그 종이만 보고 출발한다. 종이가 잘못 전달되는 실수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목적지를 잘못 찾아 12만원어치를 주행한 택시를 오직 나만 탑승했을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당장 내 앞뒤에 있었을 다른 누군가의 택시도 종이를 잘못 전달받아 엉뚱한 목적지로 향했을 테니 말이다. 올림픽이 개막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다. 감염병의 재난 속에서 처음으로 세계를 집결시킨,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올림픽은 이제 시작됐다.

도쿄=김철오 문화스포츠레저부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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