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급이, 위계가 뭔 소용..효율성에 집중하라

명순영 2021. 7. 21.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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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빨라진 재계 직급 단순화

CL1, CL2, CL3, CL4….

암호 같은 알파벳과 숫자가 뭘 뜻하는지 아시는지. 삼성전자가 2017년부터 시작한 직급 체계다. CL은 ‘커리어레벨(Career Level)’의 약자로,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이어지던 전형적인 직급 틀을 완전히 깼다. 예전 기준으로 따지면 CL1은 사원, CL2는 대리, CL3는 과장·차장, CL4는 부장급에 해당한다. 직급을 바꾸며 호칭도 달라졌다. ‘님’ ‘프로’로 통일하거나 영어 이름으로 부른다. 보수적인 기업 문화의 상징이었던 현대차도 변화의 선봉에 섰다. 역시나 알파벳으로 된 직급으로 바꾸며 단순화했다. 5급과 4급 사원은 G1으로, 대리는 G2, 과장은 G3, 차장과 부장은 G4로 통합됐다. 호칭은 더욱 단순화해 G1~G2는 매니저, G3~G4는 책임 매니저 2단계로 합쳤다. 여기서 G는 등급(Grade)을 뜻한다.

현대중공업은 지난해 12월부터 기술 인력 직위를 단순화했다. 부장·차장·과장 직위를 ‘책임 엔지니어’로 통합했고, 직급은 기존 부장급, 4급 등을 ‘HL(현대중공업 리더)5~HL1’으로 바꿨다.

▶보수적인 금융권도 변화

▷‘핀테크’ 인재 뺏길라 수평 문화

변화에 예민한 IT 기업은 더 파격적이다. 카카오에서 직급은 오로지 ‘팀장’과 ‘팀원’만 존재한다. 팀장도 직급이 그러하다는 것일 뿐, 서로 영어 이름만 부르기 때문에 팀장인지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김범수 카카오 의장은 자신을 소개할 때 ‘브라이언’이라는 이름을 쓴다. 김주원 카카오뱅크 이사회 의장도 ‘제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본인이 정한 영어 이름을 입사할 때부터 인사 시스템에 등록하고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한국 이름과 연차를 잘 알지 못할 정도다.

직급 단순화 바람은 어제오늘 얘기는 아니다. 대기업 중에서는 CJ그룹이 2000년부터 직급은 유지하되, 모든 직원을 ‘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하며 변화의 시작을 알렸다. 본격적으로 직급 파괴에 나선 것은 SK그룹이다. SK텔레콤은 2006년부터 직급을 없애고 ‘매니저’라는 직책을 부여했다. SK하이닉스는 2019년부터 ‘사원-선임-책임-수석’으로 나뉘어 있던 기술사무직 전 직원의 호칭을 기술리더(Technical Leader), 재능리더(Talented Leader)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은 TL로 통일했다. SK그룹은 임원 직급도 단순화해 상무·전무를 없애고 전부 부사장(Vice President)으로 통일했다. SK이노베이션 역시 올해부터 PM(Professional Manager)이라는 호칭으로 통일했다. PM은 ‘스스로 업무를 완결적으로 관리하는 프로페셔널한 구성원이 되자’는 의미를 담았다.

기업이 직급을 단순화하려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첫째, 의사 결정을 빨리 내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직급이 줄어들면 그만큼 보고 체계가 간편해진다.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동시에 사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 하나금융 계열사가 의사 결정 단계를 ‘팀(unit) 리더-임원-CEO’로 간소화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금융은 임원도 모두 부사장으로 격상하며 의사 결정 단계를 줄였다. 민첩함을 강조하는 ‘애자일’ 조직문화에는 직급 단순화가 어느 정도 필수 요소인 셈이다.

천장현 머서코리아 부사장은 “가장 나쁜 의사 결정은 느린 의사 결정이라는 말이 있다”며 “과거에는 가벼운 현안도 5~6명 결재를 받아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요즘같이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째,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어 젊은 인재를 유치하려는 의도가 강하다. 직급을 단순화하면 경직된 위계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개성이 강하고 수직적인 문화에 반감을 가진 MZ세대를 겨냥한 변화인 셈이다. 또한 승진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트렌드에도 부합한다. 지난 7월 1일 신한생명과 오렌지라이프를 합쳐 새로 출범한 신한라이프는 보험사 최초로 전사적 호칭 파괴에 나선다. 보수적인 금융권에서 호칭 파괴에 나선 것도 수평적 조직문화와 관련 깊다.

셋째, 인사 적체와 고임금을 해소하려는 ‘실질적인’ 이유도 있다. 직급을 단순화하면 연차가 쌓인 직원을 꼭 승진시켜야 하는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아울러 승진에 따른 자연적인 연봉 상승 효과를 재점검하는 기능이 있다. 한 대기업 인사담당 임원은 “1970년대 초반 베이비부머세대가 조직 내 간부로 올라서며 高직급 관료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며 “직급을 단순화해 인사 적체를 해소하는 대신 금전적·비금전적 보상안을 함께 마련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고참 직원 홀대한다” 비판도

▷결국 CEO 변화 의지가 핵심

직급 단순화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직급 파괴에 나섰다가 다시 과거 직급으로 돌아온 사례가 적지 않다. KT, 한화, 포스코 등은 직급이나 호칭 간소화를 시도했으나 제도 정착에 실패했다. KT는 2009년부터 5년간 직급 대신 ‘매니저’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그러나 2014년부터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으로 회귀했다. 한화는 2012년 사원은 ‘씨’, 대리부터 부장은 ‘매니저’로 부르도록 했지만 3년 만에 제도를 없앴다. 포스코도 2011년 매니저·팀·리더·그룹 리더 등으로 직급 간소화를 시행했다가 6년 만에 기존 직급 체계로 복귀했다.

장점이 많아 보이는 직급 단순화를 왜 포기했을까. 실패한 기업 내부에서는 한결같이 “호칭 빼고는 달라진 게 없다”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온다. 수직적인 문화나 경직되고 느린 의사 결정 체계가 바뀌지 않았던 게 실패 요인이었다. 직급은 다른데 호칭만 비슷하니, 선후배 간 ‘어색한’ 상황만 연출되기 일쑤였다.

고참 직원이 홀대받는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저해 요인이다. 대기업 A사는 과장·차장을 없애고 전부 부장으로 호칭을 통일했다. 그러자 이미 부장이었던 ‘고참’ 부장이 볼멘소리를 냈다. 그간 궂은일 도맡아 고생하며 ‘대기업 부장’에 올랐다는 뿌듯함이 있었는데, 과거 과장·차장과 똑같이 부장 소리를 듣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아는 후배들은 ‘수석 부장’이라는 있지도 않은 타이틀을 얹어줬다.

국내 진출한 외국계 기업에서 비슷한 경우가 발생한다. 한 글로벌 유통 기업 B사는 전 사원이 ‘씨’로 호칭을 통일했다. 그러나 국내서 ‘씨’는 ‘하대’의 의미로 인식되기도 한다. B사의 고참급 직원은 “후배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다가도 ‘○○ 씨’라는 호칭을 들으면 내가 선배인가 싶은 불편한 마음이 든다”며 “회사에 충성을 다해도 보상받는 느낌이 없다”고 말했다. 승진 기회가 줄어들어 사기가 저하된다거나, 영업 현장에서 고객을 상대할 때 호칭이 불편하다는 의견도 귀담아들을 만한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직급 체계 개선이 성공하려면 CEO를 포함한 경영진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낸다. 예를 들어 카카오처럼 오너·대표 할 것 없이 호칭을 통일해야 직급 단순화가 문화로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둘째, 리더의 일하는 방식이 변해야 한다. 직급을 단순화하는 최대 목적은 ‘효율성’ 향상이다. 리더가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똑같이 사사건건 개입한다면 직급 단순화는 아무 소용이 없다. 또한 수평적인 조직문화에 맞게 낮은 연차 직원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이끌어줘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린다.

셋째, 사람 중심이 아니라 직무 중심으로 조직문화가 변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어떤 일을 하느냐에 따라 개인 역량이 결정되면 수직적인 조직문화가 자리 잡을 틈이 없어진다. 천장현 부사장은 “직무 성과에 따른 보상 시스템이 안착하면 직급 자체의 의미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며 “단순하게 직급 축소에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직급 체계 변경에 따라 채용, 업무 방식, 부서 배치, 보상 등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종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8호 (2021.07.21~2021.07.27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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