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에 훼손된 조선 왕실의 태실, 현재 모습
[변영숙 기자]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신비롭고 오묘하다. 출산의 순간 산모와 태아를 하나로 연결해 주던 탯줄이 잘려 나가는 순간 아이는 하나의 온전한 생명체가 된다.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태를 생명의 근원이며 아이의 미래의 운명과 직결되는 신성한 것으로 여겼고 잘라낸 태를 처리하는 데에 정성을 다했다.
선사 시대부터 장태 문화 발전... 왕권 강화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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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삼릉 태실 서삼릉 태실은 22기의 오석비군과 32기의 화강석비군으로 나뉘어 있다. 오석비군은 왕과 왕세자의 태실비(태비)이고 화강석비는 왕자와 왕녀의 태비이다. 조선 태조, 세종 대왕 등의 태실도 이곳에 봉안되어 있다. |
| ⓒ 변영숙 |
장태 문화는 이미 선사시대에도 있었고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시대로 이어졌다. 장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김유신의 태실에 관한 것이다. '김유신이 태어나자 오늘날 충북 진천에 해당하는 진주현 남쪽 15리에 태를 묻고 태봉산이라 불렀다'라고 나온다. 가락국왕의 응달리 태봉, 울주 보은리 태봉, 전북 익산시 태봉산 정상에 남아 있는 백제 무왕의 3왕자 태실지, 철원 태봉산 궁예의 태실 역시 우리 민족의 오랜 장태 문화를 보여준다.
고려 시대에는 왕실의 안태 제도가 정착되었고 나아가 왕권의 권위를 상징하게 되었다. 안태 관리를 위한 관리를 따로 임명하였고 태장경에 기초하여 안태 의식을 행했으며,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 태실지를 정해 왕실의 권위를 지방까지 널리 알리는데 활용했다. 경남 밀양시 초동면 귀령산 고려 19대 인종(1109~1146)의 태실지, 경북 영주시 순흥면 고려 25대 충렬왕의 태실지, 소백산 내 경원봉 27대 충숙왕 태실지 등이 남아 있다.
조선 시대에는 왕실의 장태를 국운과 연결지어 더욱 엄격하고 까다로운 절차와 의식을 거쳐 진행됐다. 출산 전부터 산실청을 설치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태실도감'과 '관상감'을 설치해 태봉지 선정부터 태실조성 및 안태에 이르는 전 과정을 총괄하게 했다.
태실 조성은 태를 씻어 말린 후 내항아리에 넣고, 내항아리는 다시 외항아리에 넣어 밀봉한 후 태지석과 함께 매장하고 석물을 세운 후 주위에 금표비를 세웠다. 이때 태주의 신분에 따라 금표를 세우는 범위를 달리했다. 왕은 300보(540m), 대군은 200보(360m), 기타 왕자와 공주는 100보(180m)로 정하고 주변의 일체의 채석과 벌목 및 개간, 방목 행위를 금지시켰다. 태실 조성은 여아는 3개월 안에, 남아의 경우는 5개월 안에 조성되도록했다.
왕릉이 도성에서 100리 안팎에 조성된 것과는 달리 태실은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 도성에서 먼 전국의 길지에 조성하여 왕권이 지방 곳곳에 미치고 있음을 보여주도록 했다. 태실이 조성되는 지방은 군으로 승격시켰고 세금과 노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때문에 각 지방들은 태실을 유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했다.
한편 조선 왕실은 왕족이 아닌 일반인이 태를 묻는 것을 금지하는 '장태법'을 시행하기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조선 왕실의 태실이 전국 길지에 수 백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전국적으로 10여 곳에 불과하며 그나마 남아 있는 태실지도 부실한 관리하에 방치 상태로 놓여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 조선 왕실의 태실은 처참하게 훼손되었다. 전문적인 도굴꾼과 일본인들에 의한 도굴과 태항아리 및 석물 반출이 이어졌다. 일제가 전국 길지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겨와 태실 집장지로 만든 것은 대표적인 태실 훼손 현장이다.
훼손된 서삼릉 묘역과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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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삼릉 태실로 가는 숲길 서삼릉 태실로 들어가는 소나무 숲길 |
| ⓒ 변영숙 |
서삼릉 입구에서 2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태실 입구 역시 서삼릉 묘역이 훼손된 결과이다. 애초 136만여 평에 달했던 서삼릉 묘역을 농림축산식품부의 젖소개량사업소, 마사회의 종마목장, 골프장, 군부대 등에 불하하는 바람에 서삼릉의 규모는 6만평 정도로 줄어들었고, 별도의 출입문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효릉은 출입금지구역에 있어 탐방이 불가능하다.
안내인과 함께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걸어 도착한 태실의 풍경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곳에는 그 어떤 생명 존중 사상도, 조선 왕실의 위엄도 없었다. 보호 철책이 둘러 쳐진 비좁은 구역에 크기와 모양이 똑같은 비석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있는 모습은 참혹하기 그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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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삼릉 태실 서삼릉 태실은 총 54기의 왕과 왕세자 및 공주와 왕자들의 태실이 모여 있다. |
| ⓒ 변영숙 |
서삼릉 태실은 오석비군과 화강석비군으로 나뉘어있다. 오석 비군 22기는 왕과 왕세자의 태실비이고, 화강석군 32기는 왕자와 공주의 것이다. 태실비 전면에는 태주와 건립 시기 및 초안지 위치 등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일본의 소화 연호를 지운 흔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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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실비의 뒷면 태실비에는 태주의 이름과 옮겨진 일자 등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연호가 지워진 흔적이 있다. |
| ⓒ 변영숙 |
담장은 철거되었지만 망한 왕조의 비참함은 무엇으로도 감춰지지가 않았다. 발걸음을 돌리면서 '망한 왕조의 한'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망한 조선 왕조의 태실을 복원하여 조선 왕조와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자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저 옹색하게 서 있는 태주들은 원래 자리로 돌려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폐비 윤씨의 묘와 태실이 모두 서삼릉 태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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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묘 서삼릉 태실에 있는 회묘는 폐비 윤씨의 묘이다. |
| ⓒ 변영숙 |
오랫동안 책에서만 보았던 회묘를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드라마에 자주 등장해서인가. 마치 아는 어른의 묘소처럼 느껴졌다. 회묘는 원래 회기동 현 경희대 의료원 자리에 있었으나 1969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사약을 받고 사사된 폐비 윤씨의 묘는 7년 동안 표석도 없었다가 7년 후에야 '윤씨지묘'라는 표석이 세워졌다. 1494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1496년 생모 윤씨의 묘에 회묘라는 묘호를 내린데 이어 1504년(연산 10)에는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존하고 회묘를 회릉으로 승격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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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묘의 문인석 슬퍼 보이는 회묘 선인석 |
| ⓒ 변영숙 |
서삼릉 태실 탐방은 막연하게 알고 있던 조선 왕실의 장태 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장태 및 안태 문화가 조선 왕실의 전유물이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의 고유한 전통문화이며, 생명 존중 사상의 발현임을 알게 된 것은 이번 탐방의 가장 수확이었다.
<참고자료>
서삼릉 태실 안내자료
서삼릉태실연구소 공식 블로그
김득환 저 조선 앙실의 태실연구
조선의 세계적인 문화 유산 태실 / 김득환 지금 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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