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52시간' 더딘 안착..칼퇴근? 소득 줄어 "투잡 출근"

최재필 2021. 7. 3. 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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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가냐 소득이냐.. 험난한 워라밸 사회로 가는 길
수당 크게 줄어 몰래 알바 불가피
겹벌이 늘어.. 제도 취지 무색 우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울산의 한 조선소 협력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는 김모(37)씨는 지난해 여름부터 칼퇴근 후 택배사무소에서 야간 근무를 하고 있다. 300인 미만 사업장에 주52시간제가 적용되면서 주말 특별근무를 포함한 시간외수당이 확 줄었기 때문이다. 김씨는 “회사는 근로자의 겸업을 금지하지만 4인 가족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택배 아르바이트 선택이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퇴근하고 다른 일’ 이게 워라밸?

익명을 요구한 조선업계의 한 관계자는 2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작년부터 식당 서빙을 하거나 택배 물류 작업·퀵서비스 배달 등 퇴근 후 투잡(겹벌이)을 뛰는 지인들을 많아졌다”며 “대부분 회사 모르게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기 때문에 투잡이 음성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회사 차원에서는 작업 물량이 늘어도 고정비 지출 부담에 충원하지 않고 버티는 수준”이라며 “주52시간제 필요성을 부정할 순 없지만 업계의 상황이 반영되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덧붙였다. 투잡러가 늘어날수록 제도 취지 자체가 무색해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 1일부터는 5~49인 사업장에도 주52시간제가 도입됐다. 위반 사업주는 2년 이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받는다. 단 신고 접수 후 최장 4개월의 시정 기간이 부여된다. 정부는 2018년 3월 주52시간제 도입을 확정한 이후 3년여간 준비 기간을 줬으므로 소규모 사업장에 계도기간을 더 주긴 어려웠다는 입장이다. 다만 제도 안착을 위해 탄력·선택 근로제 기간을 확대하고 시설·설비 고장 등 돌발상황이나 업무량 폭증 때는 사업주가 노동자 동의와 고용노동부 장관 인가를 받아 1주에 최대 12시간까지 연장근로를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또 5~29인 기업은 근로자 대표와 합의를 전제로 주 60시간까지 일할 수 있도록 했다.

30인 미만 ‘주 60시간’도 쉽지 않아

정부의 주52시간제 보완에도 불구하고 업계에서 반발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5~29인 업체가 주60시간 근무를 시행하려면 근로자 대표와 합의를 해야 하는데 관련 제도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현행 근로자 대표 제도는 전체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대표자, 노동조합이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를 근로자 대표로 인정한다.

2019년 기준 노조가 있는 30인 미만 사업장은 0.1%에 불과하다. 5~29인 사업체 74만여곳 대부분은 근로자 대표를 따로 정해야 하는데 세부 기준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다는 우려가 크다. 10인 미만 영세 사업장에서는 근로자 대표 선임에 사업주가 개입할 거란 의견도 있다.

업무량이 폭증할 때 근로자 동의와 고용부 장관 인가를 받아 주 12시간 연장근로를 초과할 수 있도록 한 대책도 실효성이 크지 않을 거란 전망이 나온다. 주52시간에 12시간을 더 일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계절이나 특정 시기에 일감이 몰리면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라는 불만이 많다. 이에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은 지난달 말 안경덕 고용부 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특별연장근로를 월 또는 연 단위로 사용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근로시간 유연화 방안을 마련해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월 60시간, 연 720시간 연장근로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계도기간 재고” vs “옳지만 더 보완”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지난달 국회에선 야당이 50인 미만 사업장에 대한 주52시간제 적용을 철회하고 계도기간을 부여하라는 취지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홍석준 국민의힘 의원은 “정부는 코로나19가 종식될 때까지만이라도 최소한의 계도기간을 도입해야 한다”며 “중소·영세기업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의존도가 상당한데 코로나19 여파로 외국 인력 입국이 끊겨 인력난이 극심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외국인 근로자 4만700명이 입국할 예정이었지만 실제로 국내에 들어온 인원은 11%(4806명)에 불과했고 올해 4월 기준으로도 계획 인원 3만9656명 대비 4%(1806명)만 입국했다는 근거도 제시했다.

이미 3년 전부터 시행해 온 주52시간제 적용을 더 미루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일부 전문가는 50인 미만 사업장에 제도 적용을 미룰수록 근로시간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가 드러나지 않아 지원책 수립이 어려울 것으로 본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주52시간제 시행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도 영세 중소기업 여건을 고려해 처벌보다는 컨설팅 위주의 행정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며 “정부가 업종별로 과태료 부과를 단계적으로 적용하는 방안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한국 근로시간 OECD 최상위권

정부가 50인 미만 기업에 주52시간제 계도기간을 부여하지 않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한국의 근로시간이 세계적 흐름에 뒤처져 있다는 점 때문이다. 2019년 기준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3개 국가 중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1957시간)은 멕시코(2336시간)·칠레(1979시간)에 이어 3번째다. 일본(1669시간)보다 288시간, OECD 평균(1626시간)보다는 331시간 더 길었다. 문재인정부 들어 한국의 연간 근로시간은 2017년 1996시간에서 2019년 1957시간으로 39시간이 줄었지만 같은 기간 일본은 55시간을 단축했다. 뿐만 아니라 2018년 말 국내 중소기업의 빈 일자리는 19만개에 달했지만, 실업률은 45년 만에 최악 수준인 6%대까지 치솟았다. 일과 생활의 균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구직자들 눈높이도 높아진 것이다.

고용부 관계자는 “오래 일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는 갔다”며 “일과 생활의 균형을 이루는 과정에서 일부 임금이 줄어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어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선진국은 한국보다 연 100~300시간 이상 적게 일하지만 임금이 적다는 불만은 거의 없다”며 “법 시행을 유예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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