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리포트] 30년 전 수사책임자 "개구리소년 타살 아닌 저체온증 사망"

김재산 2021. 6. 29.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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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대구경찰청 강력과장 주장
개구리소년 실종 사건 수사가 진행 중이던 1996년 당시 이들의 인적사항이 담긴 전단. 김영규 전 대구경찰청 강력과장 제공


발생 31년째를 맞는 대구 ‘개구리소년’사건 주인공인 소년들이 타살이라는 부검 소견과 달리 “저체온증으로 사망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유족들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라며 반박하고 있어, 미궁에 빠진 사건 행방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건 발생 당시 대구경찰청 강력과장으로 수사를 지휘했던 김영규(83) 전 총경은 27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골 발견 당시 경북대 법의학팀에서 사인을 타살로 발표했지만 이는 잘못된 것”이라며 “소년들은 저체온증에 의한 자연사”라고 주장했다.

김 전 총경은 “아이들 유골이 발견된 현장이 이들의 자연사를 증명하는 현장”이라면서 “유골과 함께 발견된 136개의 녹슨 탄두가 든 우유팩은 이들이 사망한 뒤 세월을 거쳐 자연에 의해 매몰된 것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2002년 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계곡의 지형 사진. 김영규 전 대구경찰청 강력과장 제공


2002년 9월 26일 유골이 발견된 현장에는 개구리소년들이 주웠던 것으로 보이는 탄두가 든 우유팩이 나왔다. 김 전 총경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은 날이 어두워지면서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옹기종기 앉아있다 저체온증으로 숨졌다는 것이다.

그는 개구리소년 가운데 한 명인 우철원 군의 두개골이 체육복 상의에 푹 싸여 있는 점, 김영규 군의 하퇴부가 체육복으로 매듭져 있는 점 등에 대해서도 계속 언급했다.

김 전 총경은 “저체온현상이 나타나면 한기가 들어 혈관이 수축되고 혈액이 몸에 제대로 돌지 않아 머리부분과 손발이 극도로 시리게 된다”면서 “이 추위를 견디기 힘들자 철원 군은 상의로 얼굴을 뒤집어썼고 영규 군은 태권도장에서 습득한 도복 띠 매는 방법으로 자신의 발목을 묶은 것”이라고 그는 설명했다.

또 “아이들의 두개골에 나타난 크고 작은 골절흔은 자연사로 숨진 뒤 ‘날카로운 돌’(청석)이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굴러 떨어지면서 생긴 것일 것”이라고 했다.

사망 후 유골로 발견될 때까지 긴 시간 동안 매년 비바람이 몰아치며 돌이 사체 아래쪽으로 떨어져 생긴 사후 골절흔이라는 추론이다.

철원 군에게 가장 많은 상처가 발견된 것은 폭포 쪽에 가장 가깝게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김종식, 김영규 군은 그 아래에 있어서 10여 개의 골절흔이 발견됐고, 조호연 군은 폭포 아래쪽에 있어서 골절흔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 전 총경은 이어 “범행 도구를 특정하지도 찾아내지도 못했다”면서 “당시 법의학팀이 두개골 골절흔은 사망하기 전에 생성된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이를 입증할 보강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유골에서 머리카락이 발견되지 않은 점도 아이들이 저체온사 했음을 알려준다고도 했다. 사체가 매장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주장으로, 살해범이 이들을 살해했다면 발견되지 않게 매장했을 것이란 추정이다.

1993년 퇴직한 김 전 총경은 2002년 9월 26일 아이들의 유골이 발견된 직후 홀로 현장을 찾았고 주변 지형을 살펴본 뒤 아이들이 이곳에서 숨지고 자연 매몰됐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말했다.

김 전 총경의 이같은 주장에 대해 유족들은 전혀 납득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철원 군의 아버지 우종우씨는 “유골 발견 당시 법의학팀의 발표를 아직도 믿고 있다”며 “모든 유족들이 경찰 수사로 살해범이 잡히거나 범인 본인이 양심선언이라도 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고 전했다.

대구경찰청은 계속 개구리소년 사건을 전담하는 수사팀을 둔 채 타살 가능성에 대한 계속 수사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경찰은 실종 당시부터 2009년 4월까지 대구경찰청 차장을 본부장으로 수사본부를 차렸다. 이후에는 용의자의 해외 도피 등 공소시효 연장 가능성을 고려해 대구 성서경찰서에서 수사전담팀을 운영했다.

개구리소년 사건은 유골 발견 직후인 같은해 10월 감식 결과가 나오면서 용의자와 관련한 제보가 1500건 이상 접수됐으나 모두 허위로 밝혀졌다. 간혹 제보가 있기는 했지만 사건 발생 초기부터 지금까지 사건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될 만한 제보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개구리소년 변사사건이란?

1991년 3월 26일 대구 달서구 성서초등학교 학생 5명이 도롱뇽 알을 주우러 나간다며 집을 나섰다가 실종된 후 11년 6개월 만인 2002년 9월 26일 유골로 발견된 사건이다. 화성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 이형호 군 유괴 살인사건과 함께 '대한민국 3대 미제사건'으로 불린다.

아이들은 실종 11년 6개월 만에 대구 달서구 용산동 와룡산 중턱 세방골에서 유골로 발견됐다. 경찰은 아이들이 길을 잃고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지만, 부검을 맡았던 경북대 법의학팀은 명백한 타살로 결론 내렸다. 그러나 범인은 물론 범행도구 조차도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살인사건의 공소시효가 15년이어서 이 사건은 2006년 3월25일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이에 유족들은 2005년 말부터 '공소시효 연장·폐지'를 촉구했지만 공소시효 연장을 골자로 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은 이 사건의 시효 만료 전에 통과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소년들이 실종된 3월 26일에는 매년 세방골 현장에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건 발생 30주년을 맞은 지난 3월 26일에는 와룡산 선원공원에서 '개구리소년 추모 및 어린이안전 기원비' 제막식과 추모제가 열렸다.

대구=김재산 기자 jskimkb@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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