ㅱ, ㆆ, ㆅ ..세종의 꿈 담긴 '한글 금속활자' 무더기 첫 발굴
세종·세조 때 금속활자 무더기 출토
"출판·인쇄사 다시 쓸 국보급 성과"
천문시계 등 과학기술 유물도 쏟아져
문화재청, 29일 인사동 발굴성과 발표
ㅱ, ㆆ, ㆅ …. 요즘은 쓰지 않지만 훈민정음 창제 초창기인 15세기에 중국 한자를 표준음에 가깝게 발음하기 위해 쓰였던 한글 자음이다. 훈민정음 서문(언해본)에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를 서로 사맛디 아니할세(나라의 말이 중국과 달라 한문·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라고 세종(재위 1418∼1450)이 밝혔다시피 이러한 표기법은 당시로선 중요 과제였다. 아예 『동국정운』(1448, 세종30)을 펴내 한문을 훈민정음으로 표음하는 방법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 같은 동국정운식 표기는 인쇄된 책으로는 내려왔지만 금속활자로는 전해진 바 없었다.
동국정운식 한글 활자를 포함해 조선 전기 금속활자 1600여 점이 담긴 항아리가 서울 인사동(공평동) 땅 속에서 나왔다. 15세기 제작으로 보인다. 일부는 세종 때 제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국보‧보물급 유물들이다. 여기에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1점과 중종~선조 때 만들어진 총통(銃筒, 화포)류 8점 등도 같이 쏟아졌다. 문화재청은 29일 오전 10시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이 같은 조선 전기 유물의 발굴성과를 발표한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유물이 출토된 곳은 수도문물연구원(원장 오경택)이 문화재청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 중인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나 지역)’. 현재의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으로, 조선 한양도성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이곳에선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의 총 6개의 문화층(2~7층)이 확인됐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건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6층(16세기 중심)에 해당된다. 각종 건물지 유구를 비롯해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자기 조각과 기와 조각 등도 같이 나왔다.
가장 관심을 끄는 게 무더기로 발견된 금속활자다. 한글·한문 금속활자의 여러 크기인 대자(大字), 중자(中字), 소자(小字), 특소자가 모두 확인됐다. 유물 자문에 참여한 백두현 경북대 교수(국문학)는 본지와 통화에서 “15세기, 특히 1460년대 활자로 보이는 것들이 대규모로 나왔다”면서 “아버지 세종의 뜻을 받들어 세조가 펴냈던 불경 언해본 『능엄경언해』(1461)와 일치하는 활자들이 다수”라고 말했다. 세조(재위 1455~1468)가 즉위한 을해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란 얘기다. 을해자는 현재 전해지는 조선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이른 것으로, 이전까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한글 소자(小字) 30여자가 전부였다.
특히 ‘하며’,‘하고’ 등 어조사 표기 때 쓴 연주활자(連鑄活字)도 10여 점 나왔다. 연주활자란 두 글자를 하나의 활자에 표기하는 것으로 당시엔 한문 사이에 자주 쓰는 한글토씨를 인쇄 편의상 한 번에 주조했다. 주격조사 ‘l’ 활자도 처음 출토됐다. 백 교수는 “오늘날과 같은 주격조사 ‘가’는 1600년대 나왔고 세종 당시엔 ‘이(l)’ 하나뿐이었다. 앞 음절 명사의 끝소리가 모음이면 ‘l’를 썼고, 받침이 있으면 ‘이’를 썼다”고 설명했다. ‘공자ㅣ’, ‘학문이’ 이렇게 표기했단 뜻이다. 이 같은 주격조사 쓰임은 인쇄본으로 전해졌지만 활자로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ㅱ, ㆆ, ㆅ 등 동국정운식 표기법이 인쇄본이 아니라 활자로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나아가 한문활자 중 일부는 세종 때(1434년)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로 추정된다. 현재 전하는 을해자보다 21년 이른 갑인자란 게 확인된다면 활자‧서지학사를 다시 쓸 수 있는 성과다. 한문 활자 자문에 참여한 이승철 청주시 학예연구관은 “1434년 세종의 명에 의해 주조된 활자인 갑인자는 서체 형태가 가장 완벽하다고 일컬어지는데 실물 추정 활자는 처음 나왔다”면서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우리 금속활자 주조 기술의 발달과정을 알 수 있는 중요 유물”이라고 평가했다.
헌재 국립중앙박물관 등에 소장된 조선 금속활자는 대부분 18세기 이후 주조된 것들이다. 이번 인사동 출토 활자들은 15세기 중엽부터 16세기까지 약 100년간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의 구텐베르크 이전인 1377년 찍은 세계 최초 금속활자 인쇄본 『직지심체요절』 이후 발전을 거듭했던 조선 금속활자 주조술을 엿볼 수 있다. 백 교수는 “그간 인쇄본으로만 만났던 활자의 실물이 나옴으로써 임진왜란 이전 세종‧세조 때 출판‧인쇄 문화의 전개와 조선 후기 활자의 발달과정을 유추할 수 있다”고 했다. 이승철 연구관도 “세계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우리 발명품이라 할 금속활자와 한글이 합쳐진 실물의 초창기 모습이 처음 확인됐다”며 이번 발굴 성과를 강조했다.
활자가 담긴 항아리 안에선 세종~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으로 보이는 동제품들도 잘게 잘려진 상태로 나왔다. 『세종실록』에서 작은 구슬을 저장했다 방출하여 자동물시계의 시보(時報) 장치를 작동시키는 장치인 주전의 기록과 일치하는 형태다. 이에 따라 주전은 1438년(세종 20년)에 제작된 흠경각 옥루이거나 1536년(중종 31년) 창덕궁의 새로 설치한 보루각의 자격루로 추정된다. 문화재청은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조선시대 자동 물시계의 주전 실체가 처음 확인된 것으로 의미가 크다”고 설명했다.
또 항아리 옆에선 천문시계인 ‘일성정시의’가 부품 형태로 출토됐다. 낮에는 해시계로 사용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할 수 없는 단점을 보완해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했던 기계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1437년(세종 19년) 세종은 4개의 일성정시의를 만든 것으로 나온다. 기록으로만 전해져오던 세종대의 과학기술의 실체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다.
소형화기인 총통은 승자총통 1점, 소승자총통 7점으로 총 8점이다. 복원된 크기는 대략 50~60cm 크기다. 총통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계미년 승자총통(1583년)과 만력 무자년 소승자총통(1588년, 선조 21)으로 추정된다. 앞서 만력 무자년이 새겨진 승자총통들은 이순신 장군이 활약했던 명량 해역에서도 인양된 바 있다. 이밖에 1535년(중종 30년) 4월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동종도 파편 형태로 나왔다.
문화재청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소승자총으로 미뤄볼 때 금속활자를 포함한 이들 유물은 1588년 이후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출토 유물들은 현재 1차 정리만 마친 상태로 국립고궁박물관으로 이관해 보관 중이다. 문화재청은 “보존처리와 분석과정을 거쳐 각 분야별 연구가 진행된다면 조선 시대 전기, 특히 세종 연간의 과학기술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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