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동 칼럼]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다

박현동 2021. 6. 29. 04:2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권력에 의한 언론지배도, 언론의 권력추구도 불행

반중 매체 빈과일보의 폐간이,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 사유가 두렵다. 홍콩 당국이 국가보안법 위반을 근거로 간부들을 구속하고 자금을 동결하자 빈과일보는 지난 24일자 신문 발행을 끝으로 스스로 문을 닫았다. 중국의 야만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본보 지령 1만호 발행일이었다.

신문 폐간은 사람으로 치면 죽음과 같다. 신문이라고 망하지 말란 법은 없다. 형식논리로 보면 빈과일보의 폐간은 자발적이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타의에 의한 폐간이다. 권력에 의한 타살인 셈이다. 좀 거칠지만 시중의 언어로 표현하면 ‘자살당했다’는 게 어쩌면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빈과일보 폐간은 중국의 야만성 노출
세상의 수많은 신문 중 한 곳이 문을 닫은 게 뭐 그리 대수냐고 할 수 있다. 말인즉슨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폐간에 이른다면 심각한 문제다. 그건 민주주주를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시다시피 군사정권 시절 우리는 뼈아픈 경험을 했다. 1980년 신군부는 언론통폐합을 통해 비판 언론을 문 닫게 했다. 이후 ‘보도지침’을 통해서 ‘생존 언론’에도 재갈을 물렸다. 당시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어떻게 됐는지는 잘 안다. 정치는 말할 것 없다. 언론마저 권력에 아첨하기 바빴다. 인권은 말살됐다. 민주주의는 거론조차 하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고 했던가. 서슬 퍼렇던 권력도 10년을 버티지 못했다.

빈과일보 폐간은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다시 소환한다. 너무 유명해 식상하기까지 한 경구지만 미국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했다. 무려 220년 전 일이다. “나는 당신이 하는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말할 권리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고 싸워주겠다”는 에블린 비어트리스 홀의 발언 역시 100년이 훨씬 지났다. 심지어 ‘언론자유는 모든 자유를 자유케 하는 자유다’라는 극적인 언급도 있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들도 언론자유를 소중히 여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비판 없는 찬양보다 우정 있는 비판이 낫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언론이 없는 좋은 사회보다 나쁜 언론이 있는 사회가 더 낫다”고 한 바 있다. 실제 그러했느냐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언론자유의 중요성을 보편적으로 수용한다는 의미일 게다.

민주주의 역사는 언론자유의 역사
민주주의 역사는 언론자유의 역사라고 감히 단언한다. 언론자유는 인권과 직결돼 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사회에서 인권이 보장될 리 없다. 표현의 자유는 사유(생각)의 자유와 맞닿아 있고, 이는 말이나 글 즉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생각은 일정 수준까지 제어가 가능하지만 원천적으로 제압할 수는 없다.

권력과 언론은 종종 불편한 관계다. 이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극히 정상적이다. 건강한 긴장관계는 오히려 바람직하다. 권력은 국민을 통제하고 정보를 장악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래서 독재로 흐르기 쉽다. 또 권력은 생래적으로 오만해지거나 부패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반대로 이런 권력의 속성을 감시, 비판하는 것이 언론 역할이자 존재 근거다. 언론의 견제와 균형 속에서 사회는 발전하는 것이다. 언론자유가 결코 부인되거나 훼손돼선 안 되는 이유다.

그렇다고 오해 마시라. 언론자유를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법 위에 군림할 수 없듯이 언론 역시 위법의 자유를 누릴 순 없다. 언론자유에 상응하는 책임을 마땅히 져야 한다.
언론개혁 관련법이 언론재갈법 안 돼야
언론의 현실은 어떤가. 불행한 일이지만 특정인이나 특정 세력의 저격수 또는 수호천사 역할을 해온 언론의 민낯은 아직 그대로다. 권언유착이라는 말 역시 유효하다. 진보언론 또는 보수언론 그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관변 언론과 반문 언론만 있다는 비아냥이 그리 틀린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내 편 네편만 존재한다. 이러다 보니 ‘기레기’라는 멸칭으로도 종종 불린다. 이 모든 게 자초한 것이라는 걸 부인하지 않는다. 부패한 권력만큼이나 부패한 언론도 해악이 크다. 그렇다고 그것이 언론자유를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순 없다.

만에 하나 여권이 입법 추진 중인 언론개혁 관련법이 ‘언론 재갈법’이 될 경우 민주주의 미래는 암담해진다. 기우이길 바란다. 경험적으로 보면 권력이 언론을 장악하거나 언론이 권력을 탐할 때 불행했다. 만약 언론이 권력에 아첨하거나 듣기 좋은 소리만 한다면, 권력이 그런 언론을 원한다면 소금기 잃은 생선의 내장이 먼저 부패하듯 권력 내부부터 썩어갈 것이다. 그 누구도 원치 않는다.

박현동 편집인 hdpark@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