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산방산을 닮았습니다만, 모로락입니다
[우세린 기자]
몸이 며칠째 찌뿌드드하다. 창고 속 먼지 묻은 관절인형처럼 어깻죽지와 무릎이 삐거덕거린다. 발코니 블라인드를 젖혀보니 여간 없이 하늘에는 짙은 구름이 두꺼운 이불처럼 덮여 있다. 그래, 더 자야 한다. 그때 바람이 슬며시 문틈으로 들어와 뺨을 훔친다. 바람은 바다의 젖은 입김을 품고 있다.
캘리포니아는 지중해성 기후로 사시사철 온난 건조한 것이 특징인데 늦봄이면 하늘이 전날 과음한 직장 상사의 낯빛처럼 잿빛이다. 이를 현지인들은 5월은 '메이 그레이(May Grey)', 6월은 '준 글룸(June Gloom)'이라 부른다. 한국에서는 가을을 만추(晩秋)라 부르며 짙은 그리움을 노래하는데, 엘젤리노는 늦봄, '만춘(晩春)'을 회색, 우울함으로 표현한다.
▲ 미국 캘리포니아 맨하튼비치에서 서퍼들이 파도를 타고 있다. 오전 6시쯤이라 항구에 가로등이 켜져 있다. 서퍼를 촬영하기 위해 드론으로 저공 비행을 하다 드론이 파도를 맞고 추락해 사라졌다. |
ⓒ 황상호 |
"그 안개 속에는, 수줍은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부지런한 서퍼를 에워싸며 오늘은 누구도 나를 범하지 않은 최초의 바다라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 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다."
서퍼가 아니라도 아침 창을 열고 날씨가 찌푸리다고 그날 외출을 포기하면 그건 엔젤리노의 품격이 아니다. 아니, 왜 한 달에 한화로 수백 만원 하는 월세를 내고 좁은 집에 사는가. 우리는 분명 '날씨 세금'을 내고 있다.
구름은 오전 낮 기온이 올라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오가 되기 전 증발한다. 바다가 조제한 안개 수면제에 취하지 말고 집을 나서자. 비치 보이즈의 서핀유에스에이(Surfin USA)를 들으며 1번 서부 해안도로를 달리든지, 키 큰 시카모어 나무 아래에서 마마스앤파파스의 드림 어 리를 드림 오브 미(Dream a Little Dream of me)를 들으며 시고 달콤한 햇살을 맛보든지, 일단 나가야 한다.
추마시와 살리난의 성지, 모로락
5월 주말 아침 우리 부부는 진한 모카커피를 끓여 마시고 중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어촌 마을인 모로베이(Morro Bay)로 향했다. 인구 1만여 명의 작은 관광도시로 로스앤젤레스에서 북쪽으로 320km 떨어져 있다.
▲ 중부 캘리포니아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모로베이다. 그 마을의 랜드마크인 화산 봉우리 모로락이다. 봉우리 아래 내륙과 이어지는 길은 퇴적층인 육계사주다. |
ⓒ 황상호 |
하지만 또 다른 원주민 네이션인 살리난은 원주민 사이에서도 약자다. 캘리포니아주는 그들을 원주민으로 공식 인정하고 있지만 연방정부는 명확한 사유 없이 그들을 원주민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살리난은 카지노 사업이라든지 토지와 관련한 권리 행사에 있어서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이에 살리난 원주민들은 비싼 돈을 들여 민속학자와 족보학자, 인류학자, 변호사 등을 고용해 2011년 12월 연방 정부를 상대로 소송했다. 그들은 1만 년 전부터 이 일대에 살았다는 증거를 모아 법원에 제출했는데 서류 무게만 417킬로그램 이상이었다. 하지만 아직 연방 정부와 이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모로베이라는 명칭의 유래는 스페인 선교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542년 스페인 탐험대인 후안 로드리게즈 카블릴로(Juan Rodriguez Cabrillo)가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 땅을 밟았고 이후 아시안 최초로 필리핀 선원이 스페인 대형 범선을 타고 1587년 10월 18일 상륙했다.
▲ 드론으로 모로베이를 근접 촬영했다. 화산 봉우리의 역동적인 표면이 실감나게 포착됐다. |
ⓒ 황상호 |
모로(Morro)는 스페인어로 푸르스름한 색깔을 가리킨다. 포르투갈과 이탈리아에서는 둥그런 언덕을 모로라고 부른다고 한다. 모로록은 높이 약 177미터로 2600만 년 전 마그마가 지표면으로 폭발한 뒤 빠르게 굳은 화산암이다. 석영 안산암과 사장석 등으로 구성해 있다. 동쪽 면 침식이 더 심한데 그곳 바위 파편 위에 주차장이 만들어졌다.
생김새는 제주도 산방산과 비슷하다. 산방산이 높이 395미터로 모로락에 비해 배는 더 크다. 하지만 산방산의 생성 시기는 80만 년 전으로 나이로 따지면 모로락이 산방산의 '까까마득한' 조상뻘이다. 모로락 인근 오소스 밸리(Los Osos Valley)를 따라 비슷한 모양의 화산암 봉우리가 9개가 있는데 이를 나인 시스터즈(Nine Sisters)라고 부른다. 200여 년 전 모로락은 만조 때 육지와 연결된 길이 바다에 잠겼다. 현재는 모래와 자갈이 쌓여 만들어진 퇴적층인 육계사주가 높이 만들어져 24시간 차로 이동할 수 있다.
모로락 남쪽에는 모래톱이 6.5킬로미터쯤 쌓여있다. 연안류가 남동쪽으로 사선으로 흐르면서 모래가 쌓였는데 모로 사구 보호지역(Morro Dunes Natural Preserve)으로 지정돼 있다. 가장 큰 사구의 높이는 9미터가 넘는다고 한다.
▲ 연안류에 의해 형성된 모래 퇴적층이다. 이곳은 모로 사구 보호지역으로 지정돼 있다. |
ⓒ 황상호 |
바다와 바람이 대화하고, 독수리가 너를 창조하노니
추마시는 모로락을 그들 언어로 리사무(Lisamu)라고 부르며 신성시했다. 살리난은 모로락을 레사모(Lesamo)라고 부르며 일 년에 두 번 봉우리에 올라가 천도재를 지냈다.
살리난의 창세기 주인공은 독수리다. 홍수가 나면 모로베이 북쪽에 있는 산타 루시아 봉우리(santa lucia peak) 이외에는 모든 곳이 물에 잠겼다. 어느 날 하늘에서 아침 별이 떨어졌다. 그날부터 태양과 달, 별 등 모든 것이 서로 대화할 수 있었다. 바다가 바람에 안부를 묻고 코요테가 자갈에 인사를 했다. 이때 독수리가 딱총나무 가지를 꺾어 최초의 인간을 만든 뒤 생명을 불어넣었다.
현실감 떨어지는 신화지만 사실 과학적이기도 하다. 생태작가 페터 볼레벤의 <자연의 비밀 네트워크>에 따르면, 우주에서 날아오는 미세한 입자인 우주선(Cosmic Ray)이 침엽수가 내뿜는 향긋한 향의 불포화 탄화수소인 테르펜(Terpene)의 방출을 10배에서 최대 100배까지 높여준다. 이 테르펜은 물과 쉽게 결합해 대기에서 비를 만든다. 비 혹은 안개가 땅의 습도를 높이며 다시 온갖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다. 우주가 비를 만들고 땅을 적시는 것이다. 아침 별이, 세상 모든 것들을 이어 놓은 것이다.
살리난 신화는 성스로운 땅, 모로락에도 스며있다. 어느 날 송골매와 큰 까마귀가 머리 두개 달린 대형 뱀인 탈리에카타펠타(Taliuekatapelta)를 제거하기 위해 공격했다. 하지만 뱀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새들은 모로락으로 후퇴했다. 모로락은 큰 까마귀의 정령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뱀은 계속 쫓아와 모로락을 감싸 올랐다. 그때 뱀이 가까이 접근하자 송골매와 큰 까마귀가 칼을 뽑아 뱀을 산산 조각냈다. 이후 샐리난은 태양이 가장 높이 멀리 뜰 때 모로록에 올라 큰 까마귀에게 기도를 한다.
모로락 등반은 불법이다. 1891년부터 채석 작업이 이뤄져 파괴가 심한 데다 독성 살충제인 디클로로디페닐트라클로로에탄(DDT) 남용으로 송골매(Peregrine Falcon)가 멸종 직전까지 가자 샌루이스포 카운티가 1968년 캘리포니아 역사 랜드마크(California Historical Landmark)로 지정하고 외부인 출입을 통제했기 때문이다.
모로락 아래서 봉우리를 올려다보면 송골매가 옥빛 창공을 미끄러지듯 비행하며 검은 획을 그린다. 무당이 붉은 글씨로 부적에 영험한 기운을 그려넣듯, 새는 활처럼 굽은 양 날개로 하늘을 읽고 그날의 운명을 날갯짓으로 그린다. 북부 추마시의 원로인 프레드 콜린스는 2015년 3월 14일자 로스앤젤레스타임즈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 모로락을 등반하는 것은 불법이다. 표지판에 경고 표시가 돼 있다. |
ⓒ 황상호 |
모로락 등반을 두고 흥미로운 법정 다툼이 있었다. 1999년 살리난 남성 버치가 낚시수렵국의 특별허가를 받아 천도재를 지내기 위해 암벽을 올랐는데 탐조객이 그 현장을 목격하고 당국에 신고한 것이다. 버치는 천도재가 전통문화라고 주장했지만 이 일대 토지 사용 권한이 있는 추마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침 주변에 건설 호재도 있어 단단히 의심을 샀다.
추마시는 2014년 12월 5일 원주민헤리티지커미션(Native American Heritage Commission)과 캘리포니아주 등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샌루이스오비스포 고등법원은 추마시의 손을 들어줬고 살리난의 등반이 금지됐다. 살리난 입장에서는 조상 대대로 살아왔지만 타 원주민과 사실상 침략자인 미 연방정부로부터 이중 설움을 당한 꼴이었다. 이런 원주민 네이션이 미전역에 40여 곳이다.
이후에는 2019년 10월 펜실베니아에서 온 한 남성이 모로락을 올랐다가 내려오지 못해 911 구조대에 구조 요청을 했다. 그에게는 구조대를 부른 비용 2000달러와 불법 등반 혐의로 벌금이 부과됐다.
모로락에서 특별한 경험을 하고 싶다면 서쪽 면까지 걸어가 보자. 2600만 년 된 암석이 부서져 돌무덤을 이루고 있다. 마음에 드는 돌을 집어 돌탑을 쌓으며 소원을 빌자.
▲ 모로락 서쪽 면이다. 돌탑 수백개가 바다를 바라보고 쌓여있다. 한 부부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
ⓒ 황상호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미국 대통령의 경고 "페이스북이 사람 죽이고 있다"
- [속보] 정경심 2심도 징역 4년... "입시제도 근본 무너뜨려"
- 최재형 "국민의 삶을 왜 정부가 책임지나, 국민이 책임져야지"
- 맨발로 걷다 놀라지 마세요... 죽어가던 마을을 살린 비법
- 19대 대선에서 무시 당한 굴욕 잊지 않았다
- 민간인 유해발굴지에 사는 '낭월이'의 보호자를 찾습니다
- 엄마·아내·며느리 벗어던진 그녀들, 황선홍도 감탄했다
- "교육불신 초래" 정경심 2심도 징역 4년... "대법원에 상고할 것"
- 유승민 측, '경준위 월권' 김재원에 "이번엔 진윤감별사?"
- 신중해진 윤석열... 토론회·후보등록 질문에 "캠프와 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