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은퇴' 김동석, "무릎의 8개 수술자국, 흉터 아닌 자산이죠"

서호정 기자 2021. 6. 26.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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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재능 있는 어린 선수의 등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최근 정상빈, 엄지성 등 10대 선수들이 일으킨 K리그의 새 바람은 한국 축구에 활력소가 되고 있다.


2000년대 중반에도 K리그는 쏟아진 10대 선수들의 활약에 많은 시선이 모였다. 포항은 오범석, 황진성, 박원재의 유스 3인방, 전남은 85년생 듀오 김진규와 백지훈, 울산은 브라질 유학파인 이호, 이진호로 젊은 피를 강화했다. 


가장 적극적으로 유망주 육성에 나선 팀은 FC서울과 수원삼성이었다. 지금은 만 17세 이후에야 준프로 계약을 통해 성인 무대에 뛸 수 있지만, 당시엔 그런 규제와 제도가 없었다. 기량이 뛰어난 중학생을 곧바로 프로로 끌어올려 좋은 환경에서 수준 높은 경험을 쌓도록 도와 빠른 성장을 도모한다는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그렇게 영입된 선수가 서울은 이청용, 고명진, 송진형, 김동석, 고요한 등이었고 수원은 신영록, 이강진(개명 후 이우진) 등이 있었다. 


큰 성과를 맛본 쪽은 서울이었다. 2007년 부임한 터키의 명장 세놀 귀네슈 감독은 전임 이장수 감독 시절부터 가능성을 나타낸 어린 선수들을 팀의 중심으로 과감히 기용했다. 호주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합류한 기성용까지 더해지며 서울은 진취적이고, 기술적인 젊은 팀의 이미지를 갖추게 됐다. 당시 이청용과 기성용의 '쌍용'과 함께 두각을 나타낸 유망주가 김동석이었다.


2003년 용강중을 졸업하고 FC서울(당시 안양LG 치타스)에 입단한 그는 동기인 송진형, 고명진, 1년 후배인 이청용, 고요한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냈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정교한 패스와 성인 선수들을 압도하는 기술로 4~5살 많은 형들을 놀라게 했다. 서울 시절 친선전을 치렀을 때 맞붙은 폴 스콜스 같은 선수를 꿈꿨다. 한국 축구가 주목한 영재는 또래 중 A대표팀에도 가장 먼저 입성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핌 베어벡 감독이 2006년 독일월드컵 이후 A대표팀 지휘봉을 잡자 세대교체를 위해 가장 먼저 부른 선수가 김동석, 그리고 신영록이었다.


2007년 28경기에 나서 2골 2도움을 기록하며 이청용(23경기 3골 6도움), 기성용(22경기)과 함께 '귀네슈의 아이들'이 됐다. 하지만 쌍용이 2007년을 기점으로 화려하게 비상한 것과 달리 김동석은 부침 심한 커리어를 반복했다. 대구에서 임대 생활을 한 2010년, 울산에서 확실한 백업 이상의 역할을 한 2012년, 그리고 다시 한번 커리어 하이(28경기 2골 2도움)를 기록한 인천에서의 2015년 정도가 그가 빛난 시즌이었다. 


잦은 무릎 부상과 수술이 특급 유망주에겐 시련의 연속이었다. 프로 입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어나서 첫 부상으로 수술대에 올랐다. 당시만 해도 더 좋은 선수로 커 나가는 과정의 성장통 정도일 거라 생각했다. A대표팀에 소집되기 시작하며 더 큰 날개를 펼칠 수 있었던 2006년과 2007년 잇단 무릎 부상이 문제였다. 


"처음 수술을 받은 건 왼쪽 무릎이었죠. 재활을 잘 마치고 돌아와서 2군 경기 위주로 뛰며 성장했고, 2006년 1군 데뷔를 했어요. 베어벡 감독님도 불러주셨죠. 그런데 자체 연습 경기 중에 동료의 태클에 오른쪽 무릎을 다쳤어요. 그때부터 오른쪽 무릎의 연골과 반월판만 7번 수술해야 했네요."


"8번의 수술 중 가장 아쉬웠던 건 2007년이었어요. A대표팀에 뽑히고, 서울에서도 꾸준히 경기를 뛰고 있어서 자신감이 한창 올라 있었거든요. 연습경기를 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아서 나오고 싶다고 했는데 귀네슈 감독님이 20분만 더 뛰라고 하셔서 계속 하다가 결국 다쳤어요. '그 부상이 없었다면 내 축구 인생은 어떻게 변했을까?' 지금도 머리 속에 남아 있는 순간이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선택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결국 그 오른쪽 무릎은 이후에도 그가 거쳐간 팀에서 빠짐없이 수술과 재활을 반복하는 시련을 맞았다. 그럼에도 김호곤, 이영진, 김도훈, 이기형 감독은 김동석이 가진 재능을 높이 사며 계속 붙잡고 기회를 줬다. 그렇게 그의 양쪽 무릎에는 8개의 흉터가 남았다. 오른쪽 무릎은 연골이 남아나질 않았고, 그만큼 선수 생활 지속을 위해서는 근력 강화와 자기 관리가 중요했다. 


잦은 부상으로 할 만하면 늘 꺾인 그의 커리어지만, 김동석은 그 경험을 동료들과 공유했다. 30대가 되며 베테랑이 된 뒤에는 후배들에게 부상을 조심하는 법, 재활 시의 정석적인 과정, 보강 훈련과 자기 관리의 중요성 등을 강조했다. 그런 모습을 긍정적으로 본 김도훈 감독은 2016년 인천 사령탑 시절 김동석에게 주장 완장을 맡기기도 했다. 서울에서 동고동락한 고명진, 송진형, 이청용은 물론 울산 시절 함께 뛴 이용, 김승규, 김신욱, 이재성 등과 돈독한 인간관계를 이어가는 것도 역경을 경력으로 뒤집은 그의 긍정적 모습 때문이다.


K리그에서 145경기 출전의 기록을 남긴 그는 2019년부터는 K3리그(당시 4부 리그)로 향했다. 지난 시즌까지 화성FC에서 최고참으로 후배들을 이끌었고, 2019년에는 팀과 함께 FA컵 준결승전에 오르는 성과를 냈다. 많은 이들은 굳이 K3리그까지 가면서 커리어를 이어가야 하느냐며 우려도 했지만 지도자에 대한 꿈을 일찌감치 꾼 김동석은 선수로서 더 다양한 경험을 하길 원했다. 결국 2020년을 끝으로 현역 생활을 마쳤고 최근 대한축구협회 지도자 라이선스 B급 과정을 마쳤다. 


"B급 라이선스 과정을 밟으면서 중학교 은사인 황득하 감독님(현 여의도고 감독) 생각이 많이 났어요. 거의 20년 전인데 그때 중학생 선수들에게 일주일치 훈련 스케줄과 프로그램을 미리 알려주셨어요. 경기를 치르면 육하원칙에 의거한 경기 보고서를 선수들이 써야 했고요. 수평적이고, 선수들과 많은 미팅을 하는 지도 방식, 동계훈련을 하면 우리가 올해의 주된 전술은 무엇을 삼을지를 상세히 알려주셨어요. 지금 와서 보니 아마추어 단계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혜택이었죠. 그런 디테일한 지도자가 돼 선수의 발전과 이해를 좁고 싶어요."


"프로에 와서 만난 많은 지도자 분들의 강점도 기억하고 있어요. 기술적인 성장을 마친 성인 선수를 어떻게 이끌 것인지, 감독님마다 방식은 조금 달랐죠. 최용수 감독님은 팀에 대한 장악력이 뛰어나셨어요. 팀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리더십을 배웠어요. 귀네슈 감독님은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펼치는 공격적인 카운터 전술이 대단했어요. 항상 공격 숫자를 많이 가져갈 수 있는 전술적 노하우가 있으셨죠. 이기형 감독님은 매주 경기가 있으면, 다음 상대에 대한 디테일한 분석과 대응을 잘 준비하셨어요. 상대 강점과 약점을 철저히 파고 들어서 우리가 무엇으로 허를 찌를지 준비하는 스타일이셨어요. 김도훈 감독님은 고참들을 배려하고,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선수 마음을 사는 능력이 탁월하셨고요. 프로에서는 기술의 성장보다는 전술적 준비, 그리고 선수단 마음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부분이 중요한 거 같습니다."


지난 겨울 김동석은 10대 시절 함께 꿈을 키운 동료인 송진형, 고명진, 이청용에게 처음 은퇴를 고백했다. 송진형도 지난해를 끝으로 은퇴를 결정하고 개인 사업을 준비 중이다. 울산 소속으로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고명진과 이청용은 "아쉽지만 어떤 선택이든 진심으로 응원한다"라는 말을 전했다. 김동석은 지도자를 준비하는 초기 단계인 지금 그들과 함께 선수로서 성공하기 위해 꿈을 키우던 당시의 열정을 되살리고 있다고 말했다. 


"명진이, 진형이, 청용이 모두 미드필드 포지션이다 보니까 경쟁이랍시고 누구 한 명이 운동을 나가면 무조건 다 따라서 나갔어요. 구리에 있는 구단 숙소 아파트 앞 공원에서 공을 차고, 함께 택시를 타고 클럽하우스로 가서 불 꺼진 운동장에서 하얀색 공에 의존해 치열하게 연습했던 게 생각나요. 그때 진형이랑 청용이는 프리미어리그 중계를 많이 봤고, 아스널의 아르센 벵거 감독이 추구하는 패싱 게임이 상당히 빠져 있었죠. 그때 그런 플레이를 우리끼리 따라 한다고 2군 리그에서 많이 시도했던 생각도 나요. 나중에 그게 1군 무대에서도 도움이 됐죠."


"대구, 울산, 인천에서도 좋은 추억이 많지만 역시 8년 간 몸 담았던 서울에서의 기억이 가장 많습니다. 프로로 데려와 주신 구단과 조광래 감독님 덕에 좋은 환경에서 실력을 쌓을 수 있었어요. 처음 프로에 갔을 때 (김)동진이 형, (최)원권이 형, (박)용호 형, (최)태욱이 형 등 실력과 인성을 갖춘 선배들이 어린 저희가 운동에 전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이끌어줬어요. 선수 생활 동안에는 부상이 원망스러웠지만 어느날 아버지께서 '그래도 일찍 프로에 왔으니 수술도, 재활도 가능했다. 어쩌면 니 축구 인생은 더 빨리 끝났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얘기를 해주실 때 감사함이 들더라고요."


그의 다사다난했던 선수 커리어를 압축해주는 무릎의 수술 자국은 오히려 지도자를 준비하는 김동석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부상 후 다시 선수 생활을 이어 나가기까지의 불안감을 수 없이 극복해 내며 다시 그라운드에 섰고, 그때마다 지도자의 신뢰를 다시 찾기 위해 노력한 과정은 역으로 선수들과 소통하는 다가올 시간에서 많은 힌트와 이해를 줄 것이다. 


"현역 말년에 이미 후배들에게 좋은 조언을 하고, 나쁜 것을 미리 방지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어요. 그런 경험을 했던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지도자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며 추천하더라고요. 다른 일은 나중에 할 수 있으니 가장 원하는 걸 하라고 아내도 응원해줬고요. 그래서 최근 축구를 많이 보며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어요. 부상 때문에 가진 재능을 일찍 소모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승부를 넘어 그런 선수의 아픔을 보듬고, 더 크게 성장하도록 돕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김동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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