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언젠가, 여행

박상은,온라인뉴스부 2021. 6. 26.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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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코로나19 이후 지인들의 소셜미디어에는 종종 옛 해외여행 사진들이 올라온다. 근황으로 채워진 게시물 사이에 불쑥 등장한 과거는 보통 이런 말로 시작한다. “사진첩 보다가 찾은 ○○○ 여행, 이때 참 좋았지.” 여행지에 대한 짧은 감상과 행복했던 기억을 나열한 글은 끝맺음도 비슷하다. “언제 다시 갈 수 있으려나. 가고 싶다, 해외여행….” 계절도 날짜도 장소도 다양한 사람들의 추억 소환은 단순한 향수를 넘어 어딘가 애잔한 면이 있다. 기약 없는 그 ‘언젠가’를 위해 어떻게든 버티고 있다는 신호처럼 느껴져서다.

세계의 하늘길이 닫힌다는 건 팬데믹 이전에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다. 타국 땅을 밟아본 이들은 “그 여행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며 아쉬워하고 아직 기회도 얻지 못한 이들은 “조금이라도 일찍 갔어야 했는데”라고 한탄한다. 전자에 속하는 나는 그나마 휴대전화에 저장된 사진으로 과거 여행이라도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그리움이 커져서일까. 요즘은 사진 안에 있는 내 모습뿐 아니라 프레임 밖에서 스쳐 지나간 작은 인연들까지 선명해진다. 인생 샌드위치를 만났던 길거리 음식점은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주던 까까머리 청년은 건강한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한다던 기념품 가게 아르바이트생은 여전히 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소중한 추억이 어린 공간이 너무 많은 아픔을 겪지 않았기를, 너무 많이 변하지 않았기를 빌어보기도 한다.

여행을 두고 흔히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말한다. 소설가 김영하는 산문집 ‘여행의 이유’에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인천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마다 삶에 대한 통제력을 회복하는 기분”이라고 썼다. 어지럽고 복잡하고 무질서한 일상에서 멀어지는 순간, 삶이 온전히 나의 것이라는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일상은 늘 조금씩 어긋나고 언제나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긴다. 코로나라는 몹쓸 역병은 그 대장 격이다. 일상에 대한 통제력을 위협받을수록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는 견딜 수 없이 커진다. 여행 수요가 한꺼번에 분출되는 보복 여행 현상은 예정된 일이다.

성인의 절반 이상이 최소 1회 백신을 접종한 미국은 사실상 ‘여행 정상화’에 들어섰다. 최근 공항 이용객이 210만명을 넘어서면서 2019년 이맘때의 80% 수준을 회복했다. 지난달 말 메모리얼 데이 연휴에 여행객들로 북적이던 공항 사진은 팬데믹이라는 시국을 잠시 잊게 했다. 7월 독립기념일 연휴을 위한 비행기 티켓 경쟁도 치열하다. 수요가 폭발하면서 항공권과 렌터카 가격이 2, 3배 올랐다는 소식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우리나라도 정부가 트래블버블(여행안전권역)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여행업계가 들썩인다. 트래블버블은 백신 접종 완료자가 ‘방역 안전 국가’를 여행할 경우 격리를 면제해주는 협약이다. 7월부터 싱가포르, 대만, 태국, 괌, 사이판 등 트래블버블 의사를 전해온 국가들과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갈 예정이다.

시행 초기 운항 횟수는 한정적일 것이다. 양국의 방역 상황에 따라 언제 문이 닫힐지도 모른다. 출입국 과정에선 최소 3차례 코로나 진단검사를 받아야 하고, 여행사의 통제 속에서 정해진 동선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다. 백신 저항력이 높은 변이 바이러스는 어디서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 모르는 위험 요소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떠날 것이다. 일상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

코로나 이전과 이후의 여행은 분명 다르다. 여행 준비 리스트에 코로나 음성 확인서와 마스크, 손 세정제 같은 것이 추가되는 것은 단편적인 변화다. 리스트에 적을 수 없는 수많은 단어들 속에 ‘경계’와 ‘의심’ ‘타인에 대한 두려움’ 같은 마음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김영하는 우리를 지구별의 ‘승객’이라고 표현한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의 시구를 인용하며 “지구라는 작은 행성에서 우리가 서로를, 모든 식물을 같은 행성에 탑승한 승객이자 동료로 여겨야 한다는 암시”라고 말했다. 지구에 잠시 찾아왔다가 떠나는 여행자들은 지금 코로나라는 어둡고 암울한 터널을 걸어가고 있다. 이들은 팬데믹이 종식되는 그날의 기쁨을 함께 나눌 동료들이기도 하다. 코로나 이후의 여행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건, 어쩌면 그 분명한 사실 하나가 아닐까.

박상은 온라인뉴스부 기자 pse0212@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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