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소민의 슬기로운 예술소비] 한국 유일 DMZ 사진작가 최병관 "난 DMZ 돌아이"
'사진은 만국 공통 시각언어' 느끼는 마음은 모두가 같아
“햇살이 눈부시도록 고운 어느 봄날 녹슨 철모를 뚫고 피어난 들꽃 앞에서 나는 장승이 되었습니다. 총탄에 쓰러진 병사의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심장이 멈출 것 같았습니다.”
“철모의 주인은 다시 들꽃으로 피어나 비무장지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두 손으로 가리기에는 터무니없이 작다는 걸 그때서야 알았습니다. 어렴풋이 한 맺힌 절규의 목소리가 힘겹게 들려왔습니다. 이 땅에 평화의 꽃을 피워주세요. 아리도록 그리운 고향을 자유롭게 오가며 보고 싶은 부모형제 만날 수 있는 그날을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요?” / 최 병관 ‘한국의 비무장지대, 평화와 생명을 찾아서’ 중에서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 한 곳이 바로 코리아 평화 루트인 DMZ(비무장지대)라고 한다.
1953년, 3년에 걸친 한국전쟁이 끝난 후,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휴전선(군사분계선, MDL)이 생겼다. 대한민국은 국가안보와 민족통일을 주장하며 정전협정 체결을 결사반대했지만, 결국 38선 대신 휴전선으로 남북은 다시 갈라지게 되었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각각 2km씩 공간을 두어 완충 지대로 만들었는데, 전쟁 재발을 막기 위해 설치된 이 공간을 DMZ(Demilitarizes Zone,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다.
DMZ는 전쟁, 분쟁 상태 혹은 정전 상태에 있는 둘 이상의 국가(또는 군사 세력, 동맹) 사이에 평화 조약, 휴전 협정 등에 의해서 설치된 군사 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지역이다. 비무장지대 안, 휴전선 가까이에는 판문점이라고 불리는 공동경비구역이 있다. 남북한이 만나 회담을 하는 장소로 쓰이고 있는 곳이다. 비무장지대는 군사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은 물론, 휴전선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 보호와 보안유지를 위해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km 정도를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민간인 통제구역을 넘어 휴전선을 기점으로 민간인 최초로 DMZ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DMZ 사진작가’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가 있다. 바로 최병관이다.
"서쪽에서 동쪽 끝 휴전선 155마일 폭 4km를 다시 반으로 가른 중간에 박아 놓은 1125개의 군사분계선 표지판, 이 표지판을 한 발자국만 넘어가고 넘어오면 북한 땅, 남한 땅이다."
휴전선 일대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보초 서는 북한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남북의 총부리에는 항상 실탄이 장전돼 있었고, 탄피를 발견하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군용 지프차로 갈 수 없는 곳이 많아 걷는 일은 예사였다며 사람도 길도 없는 산등성이를 헤치며 돌아다녔던 그때를 회상하듯 말을 시작했다.
최 작가가 본격적으로 DMZ 전문 사진작가로 발돋움한 계기는 1996년 대한민국 육군본부로부터 DMZ를 사진으로 기록해 달라는 제안을 받은 후부터다. 육군본부가 DMZ 기록 차원에서 사진을 남기자는 제안을 했고, 최 작가가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건군, 건국 50주년 국방부 육군본부 작가’로 위촉되었고, 이후 국내에서 유일하게 민간인 신분으로 2년여 기간에 걸쳐 GOP에서 장병들과 생활하며 DMZ의 사시사철을 담은 주인공이 되었다. 이렇게 그가 비무장지대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97년 2월이었다.
1998년까지 이어진 이 기간 동안 최 작가는 서쪽 끝 한강 하구 말도부터 동쪽 해금강까지 한반도 허리를 가로지르는 휴전선 155마일(약 245km)을 GOP 군부대에서 숙식하며 동서로 3번을 왕복 횡단했다.
DMZ 설정 후 첫 민간인의 출입이라 많은 위험과 고비를 겪으며 진행된 작업을 통해 남긴 10만여 장의 사진과 글로 ‘휴전선 155마일 450일간의 일기’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생긴 그의 별칭이 ‘DMZ 사진작가 최병관’이다. 이를 기점으로 세계적인 사진작가 반열에 오른 최 작가는 30개의 주제를 바탕으로 카메라에 담는 작업을 하는데, DMZ는 그 중 하나이다.
최 병관 작가는 스스로 ‘전생에 군인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군과 인연이 깊다며, 베트남전 참전을 시작으로 이라크전과 스리랑카 내전, 캄보디아 내전까지 종군사진작가로 활약한 인연 때문에 하는 말이라 했다.
“DMZ 155마일(248km) 중 단 한 곳도 사연 없는 곳이 없고, 전쟁의 상흔은 발길 닿는 곳마다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민간인으로서 60년 가까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그곳을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영광이지만 한편으론 크나큰 부담이었습니다.”
"비무장지대는 어딜가나 지뢰밭이다. 그러나 짐승들이나 가냘픈 야생화는
지뢰를 무서워하지 않는것 같다, 지뢰밭에 피어난 코스모스 3형제는
지뢰를 품고 태어나 평화에 관해서 속삭이고 있는 듯 했다."
“‘이번 DMZ 사진작업 중에 사고가 발생하여 죽거나 부상을 당해도 일절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겠습니다. 1997년 11.7 사진가 최병관’ 주소와 주민등록번호를 쓰고 난 후 도장을 찍었다.”
“어차피 한 번 죽는 건데 여기서 죽어도 여한 없다는 생각도 했지요. 유서를 쓰고 나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작가에게 왜 그토록 위험한 작업에 매달린 것이냐고 질문하자 “전쟁의 비극이 남아 있는 잔해들을 보면서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반드시 사진으로 기록해서 후대에 꼭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임했다”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죽음까지 각오한 상황이었지만 하루하루 사진을 찍을수록 빠져들었던 DMZ는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며, 그때를 떠올리듯 최 작가의 눈은 지긋이 감겼다.
군 수색대원 12명의 경호 아래 DMZ 촬영할 당시 “난생처음 본 희귀한 꽃(활량나물)을 찍기 위해서 수색 로를 벗어나 사진을 찍다가 미확인 지뢰지대라는 것을 알았어요. 엄격한 안내장교의 수신호를 보고 긴장 속에서 지뢰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어요. 아찔했던 순간이었지요, 그때 찍은 이 사진은 너무도 소중하지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남대천 습기가 많은 곳에 피어난 사람의 발을 꼭 닮은 조그만 꽃이 바람에 하늘거렸다,
나는 그 꽃이 전쟁 때 산화한 젊은 병사의 발이라고 생각했다."
목숨 걸고 뛰어든 DMZ 사진촬영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바로 1997년 말에 닥친 IMF 외환위기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국가적 위기 앞에서 온 국민이 힘을 모으는 상황이었고, 당시 DMZ 촬영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건군. 건국 50주년 DMZ 사진촬영’의 예산이 대폭 축소되어 중단위기에 빠졌다. 당장 필름 값도 충당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가 하루에 사용하는 필름이 20롤이니 한 달이면 수백만 원이었고, 사진작업은 이미 6개월 이상 진행됐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대로 멈출 수는 없었다.
최 작가는 이러한 고민을 어머니께 털어 놓았고, 놀랍게도 어머니는 ‘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선뜻 시골 땅을 팔았다. 최 작가는 사진 작업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충당할 수가 있었다. 땅이 많고 돈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나라를 위한 일’에 아들과 함께 전부를 내어 주신 분이 그의 어머니였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어머니를 떠올리는 최 병관 작가의 눈시울은 어느새 흠뻑 적셔있었다. 육군 본부는 최 작가가 이렇게 나오니 도리어 협조의 뜻을 밝혔고. 사진작업을 지속하고 저작권 일체를 최 작가에게 위임하기로 했다.
한차례 고비를 넘겼지만 사선의 경계는 수도 없이 닥쳐왔다. 눈이 오면 1~2m씩 쌓여 방향을 잃기 일쑤였고, 여차하면 지뢰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철책선 절벽에서 바람이 불 때면 온몸이 휘청했고, 가방이 떨어져 카메라가 망가지는 일도 있었다. 좀 더 생생한 모습을 담고 싶은 욕심은 그를 북쪽으로 이끌었고 안전을 우려하는 군 관계자들은 남쪽으로 잡아당기며 의견차가 수시로 발생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가 군에 내민 것은 유서였다.
이렇게 그의 DMZ 사진 촬영은 이듬해까지 지속 되었다.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은 장소를 3개월 동안 오간 적도 있다. 최 작가는 완벽한 색과 장면을 허락할 때까지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결국 검게 녹슨 철조망에 눈이 내려앉으면서 장관을 이뤘다. 철조망은 하얀 눈꽃을 피어 파란 하늘과 마주했다. 그럼에도 중간 중간 냉혹한 분단의 현실과 마주했다. ‘이 땅에 두 번 다시 전쟁이 발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가칠봉은 휴전선 155마일 철책 선에서 제일 높은 산이었다, 가칠봉과 마주보고 있는 스탈린 고지, 김일성고지, 모택동 고지가 손에 잡힐 듯 가까운 거리에 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2년간 찍은 사진은 10만장에 이르렀다. 그의 작업이 빛을 본 것은, 1998년 9월부터 10월까지 용산 전쟁기념관 에서 열렸던 ‘건군, 건국 50주년 국방부, 육군본부 기획초대전’이었다. ‘회한과 긴장 그리고 소망의 땅 휴전선 155마일’이란 주제로 열린 이 초대전에 당시 김대중 대통령까지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할 정도로 성대했다. DMZ 평화를 알린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외교통상부장관 표창, 인천광역시 문화상(미술부문), 육군참모총장 감사패 등을 수여 받았다. 최병관 작가는 DMZ의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사진에 담으며 전시만 마흔다섯 차례 가졌으며, 국내 전시는 물론 일본, 미국 등에서도 DMZ 사진을 공개한 바 있다.
2004년, 일본 NHK에서 그를 ‘아시아의 작가’로 선정해 ‘한국의 사진가 최병관 편’을 20분간 방영하면서 그의 작품세계가 해외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일본 동경미술관과 아오모리, 미국 하와이에서도 수차례 전시회를 가졌다. 일본 도쿄사진미술관에서 한국 사진작가로는 처음으로 그를 초청해 ‘비무장지대의 비경’을 열어 주었다.
미국 뉴스 채널인 CNN은 2010년 최 작가의 인터뷰와 함께 그가 찍은 DMZ 사진을 소개했다. 당시 최 작가는 “DMZ는 고라니, 노루, 재두루미를 포함해 희귀한 동식물들이 살고 있다”며 “세계 자연 문화유산으로 등록될 가치가 있는 곳이며, DMZ 사진작업은 생태환경을 담는 것뿐만이 아닌, 인류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공간을 담는 의미 또한 갖는다”고 말했다.
그의 사진이 공개되고 각국 생태학자들은 DMZ를 주목하기 시작했고, 드디어 지난 2019년 6월 경기 연천군과 강원도 DMZ 일원이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은 생물 다양성 보전 가치가 있는 지역과 그 주변지역의 지속가능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 유네스코 MAB의 세계생물권보전지역 네트워크 규약에 따라 국제적으로 인정된 지역을 말한다.
"동부전선 산골짜기 바위 밑에는 멸종위기라고 했든 산양 20여 마리가 떼 지어 먹이를 찾고 있었다. 가깝게 다가가 카메라 셔터를 수없이 눌러대도 도망가지 않았다. DMZ의 동물들은 한국군이 괴롭히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평화와 생명’의 메시지를 담은 DMZ 사진은 ‘특정국 작가의 전시는 하지 않는다’는 유엔(UN)의 전시 원칙도 무너뜨렸다.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기념해 반기문 사무총장 주관으로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의 DMZ, 평화와 생명을 찾아서’라는 제목의 사진전이 진행됐다. 사진이 전하는 메시지는 언어의 경계도 필요치 않았고, 세계는 그가 전하는 평화의 가치에 주목했다. 사진 책을 출간하여 192개 나라에 증정했고, 지금도 그의 작품은 유엔본부 청사와 사무총장 공관에 남겨져 있다.
2010년 유엔본부 전시당시 스리랑카 대사가 ‘초원으로 변해버린 중부전선 비무장지대’ 사진을 보고 ‘골프장이 참 아름답습니다’라고 말을 해서 ‘사진은 골프장이 아니고 DMZ입니다’라고 설명을 했다는 작가에게는, 유엔전시를 통해 우리의 비무장지대를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된 후 전쟁포로들이 다리를 건너 남으로 북으로 향했다 한국군 포로들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이젠 자유다”라고 외쳤다. 그 이후로 ‘자유의 다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가 다시 DMZ를 찾은 건 2000년, ‘6·15 남북공동성명’에 따라 경의선 철도를 복원하면서였다. 전쟁으로 끊어진 경의선 철도, 도로연결 복원공사가 그해 9월 18일에 시작되자, 세계의 언론들은 한반도에 집중 되었으며 특히 지뢰 제거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한국군은 지뢰를 제거하기 위해 자체 개발한 ‘6단계 지뢰제거 작전’으로 32제곱미터의 넓은 경의선 복원공사구간에 깔려있던 수만 발의 지뢰를 단 한건의 인명사고 없이 모두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공사가 시작된 2000~2003년까지 전쟁으로 끊어진 경의선 철도 연결 비무장지대 사진 작업으로, 도로복원 현장의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으나, 애초 예정된 박물관 계획이 무산되면서 당국으로부터 필름 값은 물론 어떠한 지원도 받질 못했다. 남북 관계가 경색하고 이런저런 정치적 이유로 출판이 미뤄지다가, 2015년 12월에서야 통일부 지원을 받아 ‘경의선 통일의 길을 잇다’라는 제목으로 사진집이 나왔다. 그가 찍은 사진이 세상의 빛을 보기까지도 그렇게 십 수 년이 걸렸다.
2002년 9월 18일 반세기 동안 소수의 작전 병력 외엔 어느 누구도 접근을 할 수 없었던 전쟁이 남방한계선 철책선이 무너지는 순간 쏟아지는 감격의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평화의 발걸음은 시작되었으며, 철책선 너머 DMZ에 위치한 ‘죽음의 계곡’에는 철길이 다시 새롭게 놓이고 그때부터 한국군은 그곳을 ‘희망의 계곡’이라고 다시 불렀다.
“군사분계선 표지판 외에 아무것도 없어요. 중간에 표지판만 있고 철망도 없죠. 북쪽에서는 표지판이 어떻게 보이는지 궁금했어요. 고개만 슬쩍 돌려 북쪽 표지판을 봤더니 우리와 똑같이 한글·영어·한자로 써 있더군요. 이렇게 남방한계선에서 사진을 찍었으니 나중에는 북쪽에서 남쪽을 찍고 싶어요. 훗날 평양에서 이 사진들을 전시하면 좋겠어요. DMZ는 남북의 공동 유산인데 그동안 못 본 걸 함께 아는 날이 와야죠” 그는 1972년 월남전에 참전한 국가유공자였다
Bonus Note
“나는 DMZ 돌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병관 작가(71·인천시 남동구)의 사진 작업실은 흡사 DMZ박물관을 찾은 것처럼, 온통 그가 걸어온 DMZ 촬영의 흔적과 그의 생생한 작업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가 썼던 장비는 이제는 골동품 가게나 가야 볼 수 있을 법한 아날로그 니콘 FM2 사진기였다. “사람들이 카메라를 뭐 쓰느냐고 묻는데 니콘 FM2를 쓴다고 하면 다들 고개를 흔들더라.”며 그에게 남겨져 있는 필름기록을 위해 사용되고 역할을 다한 니콘 FM2 카메라들은 그의 작업실 서랍 한편에 5대가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술적인 것은 잘 모르겠지만 시간 많이 걸리고 돈 많이 들어가는 아날로그는 시대의 조류에 밀렸다”라며 “예술은 창작인데 자기한테 맞으면 그게 좋은 것 아니냐”, 작가는 해말게 웃으며 되물었다.
니콘 FM2로 촬영할 때 언제나 노(NO)연출, 노 트리밍, 노 후드, 노 포토샵을 고수 해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빛이 렌즈 속으로 직접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렌즈후드와 빛을 선택적으로 투과·제한·차단하는 작용을 하는 필터를 사용하지 않았고, 사진을 트리밍(사진 원판에서 인화지에 밀착하거나 확대할 때 구도를 조정하기 위하여 원화의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내는 일)하지 않았다. 찰칵하는 순간에 작품은 이미 끝났던 것이었다. 장비나 기교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인내와 열정으로 작가의 영혼을 담아 찍은 순수한 사진들은 생생한 감동과 놀라움을 자아내며, 보는 이의 가슴을 뛰게 한다는 평을 받고 있다. 지금은 최 작가도 디지털 카메라를 사용하고있다. 한동안 KBS에서 협찬해준 니콘 디지털카메라 D800를 사용했는데, 쇠가 닳도록 사진을 찍어 급기야 고장이 났다. 이 또한 서랍 한켠에 보관중이다. 현재는직접 구입한 니콘 D810으로 촬영 중 이다.
그의 사진작업실 한 벽에는 수십만 장의 필름이 빼곡히 보관되어 있었다. 보고만 있어도 니콘 FM2의 셔터소리가 들리고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는 최 병관 작가는 그의 말마따나 사진에 제대로 미친 예술가, DMZ 돌아이였다.
주인도네시아 한국문화원은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2019 국가브랜드사업’으로 선정한 ‘한국의 DMZ 평화와 생명의 땅 최 병관 사진전’을 1개월간 인도네시아 국립박물관에서 개최했다.
2019년 9월 인도네시아 아세안연합 갤러리 초청전시회를 관람한 아세안연합 사무총장 부인은 ’민들레 홀씨‘ 를 가장 감동한 사진으로 꼽았다. 녹슨 철조망을 비집고 올라온 민들레 홀씨는 평화와 소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최 작가는 전시 중 아세안연합 사무총장 부인과 여성장관이 관람을 하면서 ‘민들레 홀씨’ 사진 앞에서 깊은 감동의 모습을 보이며, 수차례 방문해 그 앞을 떠나질 못하며 흐느끼는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전시가 끝나고 귀국 후, ‘민들레 홀씨’ 사진을 다시 제작하여 외교 경로를 통해서 사무총장 부인에게 전달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아세안연합 사무총장 부인에게서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보다 더 활발한 교류가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2019년 인도네시아 아세안연합 갤러리에서 초청전시가 성황리에 치러지면서 생겨난 신조어 ‘K-photo’ 는 최 병관 작가의 새로운 별칭이 되었다.
오직 마음으로 보고 셔터를 누른다는 그의 사진은 매 순간 카메라를 통해 관통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별다른 기교 없이 촬영만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었고, 줄 곳 증명 해왔다. 인터뷰 말미에 ‘사진은 세계 공통 시각언어’ 라며 최 작가는 이제 휴전선 155마일을 수차례 다니며 담은 평화와 생명의 가치가 남북의 마음을 녹이고 괴리감을 줄이는 기제로 작용하길 바랄 뿐이라 전한다.
DMZ는 ‘비무장지대’라서 사람이 드나들 수 없으니, 자연이 훼손 될 일도 없었다, 무장을 하지 않은 지역인데, 남북은 오히려 군사적 긴장이 팽팽해지고 무장이 되었다. 이토록 아이러니한 DMZ ‘비무장지대’는 이제 세계 유일한 분단의 상징물로써 온전히 자연만이 주인이 되었다. 현재, DMZ는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자연생태계의 보고로 불릴 만큼 생태적 가치가 높은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일부 DMZ지역이 앞서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 으로 지정된 만큼, 우리 정부역시 이와 연계해 한반도 동서를 가로 지르는 DMZ 생태축의 지속가능한 보전과 생태관광 자원화의 계기를 만들 방침 이라했다.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방안을 한반도 신뢰구축과 평화번영을 위해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설정했으며, DMZ 평화·생태공원 조성, 세계평화공원 조성, 국제평화 지대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다. 이는 DMZ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고, 국제사회의 지지와 참여 속에 남북이 비무장지대를 공동 활용하는 것이 평화를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라 전문가들은 전한다.
한편, 통일부는 지난 15일 6·15 남북공동선언 21주년을 기념해 시작한 '비무장지대(DMZ) 평화의길 통일걷기 2021' 6월 동서횡단 행사를 오는 27일까지 진행한다고 발표했고, 민간과 지자체별 다양한 DMZ 평화예술제, DMZ 아트프로젝트 등이 한창 개최되고 있다.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예술계에도 DMZ는 빠질 수 없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커다란 주제의식 임을 엿볼 수 있다. 바라건대 자연이 주인(공)이 되어 빛을 발하는 비무장지대(DMZ)로써 문화예술은 물론, 왜곡과 훼손 없이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 기록되고 보존되어지길 염원 한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유공자이자 대한민국 유일의 DMZ 사진작가 최 병관님의 사진첩을 펼쳐본 시간이었다. 흔히들 보훈을 과거의 역사로 한정 짓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생각해야 할 의무가 있다. 과거 질곡의 역사와 그 역사를 딛고 일어설 수 있도록 희생, 헌신하신 분들을 기억하고 예우함에서 한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밝은 미래역사를 준비할 수 있는 보훈 이야말로 진정 그들의 공훈에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
올해로 한국전쟁 71주년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유혈을 감수하신 우리 한국군과 미군을 포함한 각국 군인들께 이 시간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신 DMZ 사진작가 최 병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작가님의 작품 활동이 더 널리 세계무대로 뻗어 나아가길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함께 소망한다.
홍소민 이서갤러리 대표 aya@artcorebrow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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