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세한도' 처럼..조상 유품 물려주지 않고 기증할 터

조남대 2021. 6. 25. 13:0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18)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세한-한겨울에도 변치 않는 푸르름’이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관람했다. 세한도의 온전한 진품을 감상하면서 입수한 귀중한 문화재를 기꺼이 기증한 분의 숭고한 정신에 큰 감명을 받았다.

몇 년 전 제주도를 여행하다 서귀포 대정에 있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유배지와 추사관을 우연히 돌아보았다. 건물 외부에 ‘추사관’이라고 써놓지 않았다면 창고라고 생각하기에 십상일 것 같았다. 들어가는 입구도 갈지 자(之)로 된 길을 따라 지하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당파싸움과 모함을 받아 제주도로 귀양 온 추사의 유배길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세한도 전시회장의 안내 간판. [사진 조남대]


‘세한도’는 먼발치에서 몇 번 보았지만 직접 전시장을 방문해 자세히 관람하기는 처음이다. 추사는 제주도의 탱자나무 울타리가 쳐진 방 한 칸 초가에서 8년 4개월 동안 각종 병으로 고생하며 언제 죽음에 이르게 될지 모르는 위태로운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떠나갔지만, 제자인 이상적만은 청나라를 오가며 북경 학계의 소식과 어렵게 구한 최신 서적을 스승께 꾸준히 보내드렸다.

유배 중인 죄인에게 도움을 줄 경우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감수하면서 스승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제자가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고마웠을까? 변치 않는 신의에 감동하여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는 논어의 구절을 빌어 자신의 마음을 그림에 담아 선물한 것이 ‘세한도’다. 소나무, 측백나무와 집을 진하고 마른 붓질로 겨울의 건조하고 황량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제자에 대한 고마운 마음과 함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불나비처럼 오가는 지조 없는 선비를 탓했다. 자신의 생각과 정신을 고전에 빗대어 잘 표현했기 때문에 명작으로 평가 받고 있는 것 같다.

세한도 특별전시회장은 코로나 19로 인해 관람객이 많지 않아 조용한 가운데 둘러 볼 수 있었다. 세한도에는 추사가 그린 그림과 내력이 쓰여 있다. 제자 이상적이 청나라를 12차례나 오가며 16명의 학자로부터 그림에 대한 감상 글을 받아 덧붙였다. 감상문은 ‘군자가 송백과 같은 절의를 지키는 일이 어렵고 중요하다’라는 내용으로, 옳은 일을 하고 올바른 가치를 지키는 자세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그림으로 평가한 것이다. 청나라 학자들에 이어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와 같은 한국 저명 인사들의 감상문도 첨부되어 있다. 이런 연유로 세한도 두루마리의 길이는 총 14.695m나 된다.

국립박물관에서 전시한 14.695m의 세한도 원본. [사진 조남대]


국립중앙박물관은 ‘세한도’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후 어렵게 기증된 것을 기념해 전시회를 개최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추사를 최초로 연구한 경성제국대학 교수 후지쓰카 지카시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서화가 손재형이 ‘세한도’가 일본에 있다는 것을 알고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와중에 무려 두 달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그의 집을 방문해 ‘세한도’를 구하겠다고 청했다. 손재형의 집념과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한 후지쓰카가 ‘세한도’를 넘겨주어 우리나라로 건너올 수 있었다.

이런 분의 열정이 없었고, 시기가 늦어졌다면 포탄으로 불탄 후지쓰카의 집과 함께 ‘세한도’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되찾아온 서화가의 집념에 감탄과 함께 최고의 존경을 표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200여 년 동안 한국, 중국, 일본을 떠돌았던 ‘세한도’는 2020년 사업가 손창근 씨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함으로써 안전한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다.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가치를 지녔다고 평가 받는 ‘세한도’를 조건 없이 기증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분의 숭고한 뜻으로 소중한 문화재를 영원히 보존하면서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박물관에 기증한 7대조 할아버지의 준호구. [사진 조남대]


7대조 할아버지의 준호구 1점을 고향 박물관에 기증한 바 있다. 1819년에 상주 목사가 작성한 호적이라 할 수 있다. 호주와 호주 처의 4대조까지 성명과 직책이 기록되어 있어 요즈음 가족증명서보다 훨씬 더 자세한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박물관 측에서는 발행연도와 직인까지 명확하게 남아 있어 영구히 보존할 가치가 있다면서 전시와 학술연구에 적극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혀왔다.

전시회에서 ‘세한도’ 기증 이야기를 듣고 우리 집안에 대대로 전해오고 있는 고서 기증문제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8대 종손이라 조상으로부터 전해오던 19종류 43권의 책을 20년 전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해 오고 있다. 어떤 종류의 책이며, 역사적 가치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보려고 하였지만 아직 속 시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자식에게 물려준다고 해도 효과적으로 활용하거나 잘 보존할 수 있을지도 의문되었기 때문이다.

선대로부터 보관해 오고 있는 고문서. [사진 조남대]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보관해 온 유품이 내 손을 떠난다는 것이 조금은 섭섭하지만, 박물관에 기증한다면 더 잘 보존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향토 사료를 연구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면 큰 보람이 될 것이다. 선조들도 아마 잘 결정했다고 칭찬해 마지않으리라 생각된다.

‘세한도’를 감상하면서 제자에게 고마워하는 추사의 진심 어린 마음이 은유적으로 잘 나타나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포탄이 떨어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오랫동안 간청해 ‘세한도’를 구해 온 집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소중하게 간직해 오던 ‘세한도’를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분의 숭고하고 고마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으랴. 이에 비하면 나의 고서 기증 계획은 보잘 것 없지만 그래도 마음 한 편에는 뿌듯함이 자리 잡고 있다.

동북아경제협력위원회 행정위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