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골 때리는 그녀들'이 위기의 한국 여자축구에 던진 화두
[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SBS가 지난 16일부터 편성한 축구 예능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에 대한 관심과 반응이 뜨겁다. 파일럿 형식의 설 특집 방송이 화제를 모으자 4개월 만에 아예 정규 프로그램으로 출범했는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차지했다. 코미디언, 배우, 모델, 외국 국적의 방송인 등 다양한 컨셉의 참가 팀을 확대시키고 그들을 돕는 감독도 기존의 황선홍, 김병지, 최진철, 이천수에 최용수, 이영표가 추가 합류하며 매 회 뜨거운 승부가 펼쳐진다.
2019년부터 1년 반 넘게 인기리에 방영된 JTBC의 '뭉쳐야 찬다', 그리고 이미 큰 반향을 일으킨 축구예능의 할아버지 격인 KBS의 '청춘FC 헝그리일레븐', '날아라 슛돌이'도 있지만 '골 때리는 그녀들'은 궤가 좀 다르다. 특별한 운동 능력을 갖추지 못한 참가자들이 대부분이고, 여성들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격렬한 팀스포츠를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골과 승리라는 결과를 내는 과정을 보여준다.
'축구 하는 여성'에 대한 이미지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가령 코미디언 팀인 FC개벤져스는 특유의 응집력과 적극적인 콜플레이로 대부분의 구성원이 평균 역량을 발휘하는 조직적인 팀이다. SBS 내 또 다른 예능인 '불타는 청춘'의 출연자들로 구성된 FC불나방은 이 프로그램에서 메시와 라모스 같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박선영, 신효범이라는 축이 있다. 설 특집 당시 최하위를 기록했던 모델팀 FC구척장신은 감독 교체(최진철->최용수)라는 강수, 발톱이 빠져가면서도 특별 훈련을 해서 이기고 싶은 열망 등 축구의 현실성을 담아냈다.
FIFA(국제축구연맹)는 여자축구가 향후 축구 생태계의 큰 축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최근 여자축구 전략을 구성하고, 여성의 축구 참여 확대를 통해 정체 상태인 축구 산업에 새로운 활력소를 주고자 하는 '블루 오션'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여성들의 축구는 엘리트 축구의 전유물에 그치고 있다. 대학 내 아마추어 팀과 극소수 생활축구팀 정도가 그 범주를 벗어나 축구의 본질적인 즐거움을 향유하는 그룹이다. 한국에 여자축구가 자리 잡은 계기 자체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 참가하기 위한 대표팀의 급조였고, 30년 넘게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수백명의 학생 선수, 직업 선수를 위한 시스템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나마 엘리트 축구 위주의 시스템도 학원축구팀들의 해체, 등록선수 감소로 위기를 맞은 상태다. 지소연, 조소현 등 지난 10년 간 대표팀의 선전을 이끈 황금세대가 퇴장하는 시점에 대한 불안감은 더 커지는 중이다.
2019 프랑스 여자월드컵에서 대표팀이 조별리그에서 탈락한 뒤 대한축구협회는 여자축구에 대한 투자를 약속하고 발전을 위한 심포지엄을 가졌다. 그러나 이후 나온 대안도 결국은 A매치 같은 친선전 확대, 외국인 감독 선임 등 대표팀의 성과를 뒷받침할 뿐, 여자축구의 구조 변화를 통한 규모와 저변 확대는 좀처럼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몽규 회장은 올해 초 3선에 성공하고 새로운 4년에 대한 취임사에서도 여자축구 발전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여자축구 발전을 위한 전환점을 만들 것을 약속했고, 지원을 위한 행정 체계도 조직했다. 새 집행부에는 4명의 여성 임원이 참여했고, 협회 내부에는 여자축구 활성화를 위한 프로젝트팀이 출범했다. 그러나 코로나로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아직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변화는 축구를 즐기는 여성들 스스로가 만드는 중이다. 실업팀과 대학 축구팀 해체로 엘리트축구의 규모가 위축되는 분위기와 달리 대학 내에 자발적으로 결성된 클럽과 동아리 등 생활축구는 증가 추세다. 축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학생 선수가 아니라, 축구를 멋지게 즐기면 되는 일반 학생들이 중심이 된 클럽팀 활동이 생기를 찾으며 스포츠 용품사, 경기장 대관 플랫폼 등도 그런 움직임을 주목 중이다. 프로축구연맹이 연중 개최하는 여자 대학생 아마추어 축구대회(K리그 K-WIN컵)는 매년 규모가 확대되고 참가 팀들의 열의도 커지는 모습이다.
이런 현상은 여자축구의 발전 전략이 진학, 취업을 목표로 하는 엘리트선수 육성이 아니라 축구 그 자체를 나의 삶 안에서 즐기는 생활축구인의 규모를 늘리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함을 보여준다. 엘리트 선수 육성을 위한 폐쇄적 정책과 다양한 사고는 오히려 저변을 방해할 뿐이다. 일반 클럽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라는 과감한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런 시점에 지상파 방송을 통해 노출되고 있는 축구의 즐거움을 누리는 여성들의 긍정적 이미지는 본격적인 변화의 드라이브를 걸어야 하는 한국 여자 축구에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인생과 미래를 온전히 축구에 거는 확률 낮은 도전을 장려할 게 아니라, 방과 후와 퇴근 후 축구에 참여하는 것 그 자체를 자연스럽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몸이 부딪히는 격렬함, 팀원과의 호흡에서 느끼는 열정과 동질감이 중요한 축구라는 팀 스포츠를 통해 자신감과 활력, 능동성을 얻는다는 것을 어필할 때 비로소 저변의 확장은 가능하다.
대한민국에 등록된 1,400명의 여자축구 '선수'를 넘어, 미국과 유럽처럼 수십만, 수백만 명의 여자축구 '인구'가 지역 곳곳에 마련된 시설에서 환호하고 박수 치는 모습이 일상화되길 원한다면 현 시스템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야 한다. 공을 다루는 기술은 서툴고, 매끈한 플레이보다 우당퉁탕하는 장면이 더 많지만 축구에 임하는 진지하고 열정적인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는 '골 때리는 그녀들'은 현실에 더 넘쳐날 수 있다.
사진=SBS, 한국프로축구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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