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묘한 가스라이팅②] "다 너를 위해서야" 은밀하게 파고드는 주변의 속삭임
김재익 대표 "죄책감을 심는 걸 전제, 친밀한 관계일 수록 장악 당하기 쉬워"
가스라이팅이란 용어는 이전부터 종종 쓰이던 단어였지만 최근 서예지가 전 연인 김정현을 가스라이팅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대중에게 더 널리 알려지게 됐다.
김정현이 지난 2018년 MBC '시간'에 출연했을 당시 상대 배우인 서현과 애정 신을 모두 거부하도록 서예지가 조종을 했다는 주장이었다. 한 매체를 통해 공개된 김정현과 당시 연인 사이였던 서예지와의 문자는 대중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서예지는 김정현에게 "스킨십 다 빼시고요", "오늘은 어떻게 했는지 말 안 해?", "행동 딱딱하게 잘 하고"라며 그에게 지시했고 김정현은 복종으로 응답했다.
사회 뉴스에는 가스라이팅으로 인한 범죄가 자주 보도된다. 이때 가스라이팅은 주로 가까운 사이에서 일어난다. 가족, 연인, 친구 등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는 사람들은 '사랑'과 '우정'이란 포장 아래 교묘하게 일상을 뒤흔든다.
직장인 박혜진 씨(가명)는 전 남자친구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이 있다. 전화를 받지 않거나 문자에 조금만 늦게 답변해도 전 남자친구는 화를 내고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휘두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사과할 때면 "다 너를 사랑해서 그랬어"라는 말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네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으면 나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로 잘못을 박혜진 씨에게 미루기 일쑤였다.
박혜진 씨는 "이별을 결심하고 헤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지어 바람을 펴놓고도 '네가 날 외롭게 해서 그래'라는 말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싸움의 원인을 내게 있다고 말하는 전 남자친구를 보며 내 자존감이 많이 훼손 당했다"라고 전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는 최근 4년간 연평균 1만 8000여건 접수됐다. 지난 2017년 1만 4136건, 2018년 1만 8671건, 2019년 1만 9940건, 2020년 1만 8945건으로 매년 증가했다. 지난해 기준 매일 데이트 폭력 신고가 52건씩 발생한 셈이다.
이유미 씨(가명)는 연인으로부터 집착이나 폭력을 당한 적은 없지만 착취를 당했다고 떠올렸다. 이유미 씨는 "전 남자친구를 사귈 때 데이트 비용을 다 내가 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이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지금은 네가 다 돈을 쓰지만 나중에 내가 다 갚아줄 것이다. 나를 믿어달라', '조금만 더 지나면 괜찮다' 등의 말로 데이트 비용을 모두 지불하게 만들었다. 3년 동안 데이트 비용을 보탠 적이 스무 번도 되지 않는다"라며 "당시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헤어지고 나서 돌이켜보면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가족 간의 가스라이팅도 빈번했다. 유튜브에 업로드된 '가스라이팅 실제 예시 25문장'이란 영상에는 '이런 말을 듣고 자랐다는 게 너무 슬프다'라는 댓글이 달렸고, 1800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자신들도 부모에게 들었던 말이라며 공감을 표하는 댓글도 잇따랐다.
임영재 씨(가명)도 부모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경험이 있다. 학교 선생님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임영재 씨는 항상 기대에 충족하는 아들이 되기 위해 공부에 매달려야 했다. 임영재 씨는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공부한단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부모님한테 칭찬받기 위해, 혼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해왔다. 완벽하지 않으면 혼을 냈고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것'이라는 말로 나에게 죄책감을 심어줬다"라고 말했다.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깨닫게 된 건 심리 상담을 받은 후였다. 언제나 주눅 들어있고 자신감이 없던 임영재 씨는 심리 상담을 받으며 부모의 가스라이팅을 인정하는 일이, 자신의 존재와 삶을 부정하는 일 같았다고 털어놨다.
임영재 씨는 "다른 친구들의 부모는 그렇게 정서적으로 학대하지 않는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받는 주변 친구들을 보며 기형적인 애정의 구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방식 속에서 자라왔기에 그것이 잘못됐다고 내 입으로 말하고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멘탈케어 채널 운영자 김재익 대표는 "상대를 통제하기 위해 죄책감을 심는 걸 전제로 한다. 그러니 가스라이팅의 긍정적인 사례는 당연히 없다. '널 위해서야'라는 말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사소한 수준에서 가스라이팅을 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조종을 당하고 기대게 된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금방 장악을 당한다. 상대방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을 해주는지, 부정을 하는지 잘 살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데일리안 류지윤 기자 (yoozi44@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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