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윤석열 에워싼 범들, 사냥 시즌2

손병호 2021. 6. 25.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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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논설위원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쓴 책 ‘조국의 시간’에서 가장 흥미롭게 읽은 대목은 그가 2019년 9월에 입각하게 된 과정이다. 책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이미 그해 봄부터 청와대 민정수석이던 그에게 입각을 제안했다. 이어 그해 5월 문 대통령이 KBS와 대담할 때 “조 수석에게 정치를 권할 생각이 없다. 권력기관 개혁 법제화까지 마쳐주길 바란다”고 언급한 것 역시 장관을 시키겠다는 의미였다고 한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보고 자리에서 입각 얘기가 있었지만 매번 고사했다. 조 전 장관은 본인 대신 장관을 할 만한 사람들 명단도 제출했는데 대통령이 “핵심 대선 공약인 권력기관 개혁을 실천하려면 조 수석이어야 한다. 다시 생각하라”고 내쳤다고 한다. 고민에 빠진 그가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과도 상의했는데 노 실장은 “입각보다 2020년 총선에 출마하라”고 했고, 다른 지인들도 대부분 총선 때 고향 부산에 출마하라고 조언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대통령이 또다시 입각을 권유했고 결국 수락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문 대통령은 이미 2011년에 조 전 장관과 함께 진행한 토크콘서트에서 대통령이 되면 누구를 법무부 장관으로 앉히겠느냐는 질문에 “우리 조국 교수님 어떻습니까”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그것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문 대통령이 무려 8년 동안 구상하고 10번 가까운 입각 제안 끝에 나온 게 조 전 장관인 것이다. 심지어 불공정 문제로 사회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이를 감수하면서까지 임명을 강행했다. 그런 ‘우리 조국’을 단칼에 베어버린 사람이 바로 오는 29일 대선 출마를 선언하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다.

그래서 이번 대선은 결국 문 대통령과 윤 전 총장의 대결 구도로 치러질 공산이 크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진 않겠지만 대통령을 대신한 사람들이 윤 전 총장이 야권의 최종적인 대선 후보가 되지 못하도록, 또 되더라도 본선에서 필패하도록 온 힘을 쏟을 것이다. 책을 읽을 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데 ‘윤석열 X파일’ 사태 이후 ‘조국의 시간’이란 책 제목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부터 8개월여 남은 대선까지 진짜 조국의 시간이 될지도 몰라서다. 비단 조국만의 시간이 아니라 조국 낙마를 안타까워하고, 윤 전 총장이 대통령한테 저항한 데 대한 분노를 느낀 여권 사람들 모두의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여당 대표가 윤 전 총장 파일을 차곡차곡 쌓아두고 있다고 했다. 요즘 친문 의원들과 논객들은 윤 전 총장이 정식으로 링 위에 오르기만 벼르고 있다.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출마 콘셉트를 아예 ‘꿩 잡는 매’로 정했다. 친문 진영은 검찰의 조 전 장관 수사를 비판할 때 ‘표범’ 얘기를 자주 꺼낸다. 윤 전 총장이 2013년에 국회에 나와 한 얘기로 “수사라는 게 초기에 딱 장악해가지고, 어느 정도까지 갈 때까지는 정말로 표범이 사냥하듯이 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윤 전 총장이 초장부터 조 전 장관 가족을 정말 무지막지하게 물어뜯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제는 공수가 바뀌어 윤 전 총장을 덮치려는 범들이 잔뜩 내려오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이번 대선이 벌써부터 걱정된다. 지금은 그야말로 시대적 격변기인데, 이런 때 치러지는 대선이 과거 싸움의 재판인 ‘사냥 시즌2’로 전개될 것 같아서다. 그렇게 되면 국가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국정 운영능력이 아니라 물어뜯기 고수가 유력 대선 후보가 되고, 정책 대결을 위한 파일이 아니라 그 후보의 뒤를 캔 파일만 쌓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판에서 유권자들마저 싸움이 재밌다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정말 나라가 엉뚱한 방향으로 갈지 모른다.

그렇게 상대를 때리기 위한 싸움만 벌이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그냥 ‘사냥 시즌3’가 시작될 뿐이다. 이런 사냥 시리즈는 피 냄새를 맡은 선수들이 끝내기는 어렵다. 유권자들이 끝내는 수밖에 없다. 유권자들이 싸움을 끝내려면 대선 판이 굴러갈 때 선수들의 주먹질만 보지 말아야 한다. 주먹이 아니라 이 나라를 맡기기에 제일 좋은 비전과 정책 실행능력을 가진 사람을 정말 심사숙고해서 골라내야 한다. 과거에 대한 심판과 응징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맡길 만한 후보 말이다. 앞으로 8개월, 이 진흙탕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게 할 막중한 역할이 유권자들한테 맡겨졌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선 안 된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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