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cal Mania | 시대를 관통해 온 조선 궁궐의 정문들

2021. 6. 24.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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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는 조선 시대의 궁이 수백 년 역사를 관통하고 남아 있다. 물론 창건 당시의 모습과 자재는 아니지만 존재 자체가 역사다. 경복궁, 덕수궁, 창덕궁, 창경궁을 찾으면서 그냥 스쳐 지나간 각 궁의 정문을 눈여겨보면 서로 닮은 듯하지만 조금은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창덕궁 돈화문敦化門

돈화문 (사진 위키피디아ⓒJosh Hallett)
1963년에 창경궁의 홍화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된 정문이다. 문의 이름 ‘돈화敦化’는 ‘중용’에 나오는 말로 ‘임금의 큰 덕으로 백성을 돈독히 교화한다’는 뜻이다. 창덕궁은 조선을 건국한 이태조가 아닌 태종이 1412년에 세운 궁이다. 태종은 돈화문에 문루를 만들고 무게 1만5000근의 동종을 걸었다고 한다. 돈화문은 궁과 함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광해군이 창덕궁과 함께 1609년에 복원했다. 현재 서울에 있는 4대 궁의 정문 중 가장 오래된 문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이층 구조의 문은 본래 궁을 지을 때 정문에서 정전까지 일직선의 원칙에서는 벗어나는 모서리에 위치한다. 이는 법궁 경복궁의 존재 영향도 있었고, 무엇보다 앞에 있는 종묘의 신성함을 의식해 궁의 정중앙이 아닌 모서리에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창덕궁에는 돈화문 외에 금호문, 경추문이 있고 보통 관리들은 금호문으로 다녔다. 돈화문을 활짝 여는 때는 임금의 어가 행차나 국가적 행사 때만 가능했다.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광화문 (사진 위키피디아ⓒBohao Zhao)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으로 동향에 놓여 있다. 이 홍화문 역시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광해군이 1616년에 궁과 함께 재건했다. 창경궁은 본래 수강궁이다.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머물기 위해 1483년에 지었다. 이후 홍화문은 전란과 오랜 시간에도 그 모습을 보존해 17세기 조선의 목조 건축 양식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경복궁 광화문光化門

1990년대 조선총독부 건물 앞에 놓인 광화문의 모습 (사진 위키피디아ⓒProhibitOnions)
조선 왕조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사실 광화문은 이 문만이 아닌 경복궁 앞에 있는 육조 거리까지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로 지금은 통용된다. 1395년 이태조가 건립한 광화문은 조선은 물론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상징하는 문이다. 궁을 짓고 정문 이름을 붙일 때 ‘사방에서 어진 이가 오가는 정문’이라는 뜻의 ‘사정문四正門’으로 불렀지만 세종이 이를 광화문으로 바꾸었다. ‘광화光化’는 ‘왕의 큰 덕이 온 나라와 백성을 비춘다’는 뜻이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조선 말 고종 때 흥선 대원군이 왕권 확립을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며 세웠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제는 이 정문 안쪽에 조선 총독부 건물을 지었고 광화문을 삼청동 방면으로 이전했다. 그마저도 6.25 때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중건했는데, 목재와 석재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 원래의 아름다움을 찾기 어려웠다. 이를 2006년 문화재청이 경복궁 복원 사업을 시행하면서 원래 자리에 목조와 석재로 2010년에 복원했다. 이후 현판 글씨와 색깔이 문제로 지적되었는데 2016년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된 1893년의 광화문 사진을 전문가들이 비교 분석해 검은색 바탕에 금박 글씨가 맞다고 판정했다. 현판의 서체는 흥선 대원군의 중건 당시 글씨를 쓴 임태영의 글씨체다.

[글 장진혁(프리랜서) 사진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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