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강한 제조업이 국가 안보의 초석"

2021. 6. 21.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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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생태계 무너지는 건 한순간
복구하는데 몇 배의 힘 더 들어
미·중, 제조업 역량 강화 사활 걸어
공급망 재편 움직임, 한국에도 기회


미국이 제조업에 목 매는 이유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몇 년 전 조선산업이 한창 어려울 때 울산에 있는 한 중소기업을 방문했다. 축구장만한 현장에 사람이 드나들 정도로 큰 강관 파이프들이 몇 군데 펼쳐져 있었다. 평소 백명 이상이 시끌벅적하게 일하던 곳에 딱 한사람이 용접 불꽃을 튀기고 있었고, 사장의 한숨 소리는 길었다.

문 닫은 공장들을 지나는 동안 임대광고를 붙인 불 꺼진 공구상이 눈길을 끌었다. 공장은 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공구상도 있어야 하고, 재료 납품 회사와 고객사도 있어야 한다. 인력도 있어야 하고, 연구소, 은행, 운송회사도 있어야 한다. 이들이 서로 모여 생태계를 형성하는데, 문 닫는 제조업체가 하나둘 생기면, 공구상이 문 닫듯 생태계에 구멍이 나기 시작한다.

제조업 생태계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지만, 다시 만드는 데는 이전보다 몇 배의 힘이 든다. 그래서 제조현장 한 곳은 단지 뭔가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여러 산업활동이 함께 어우러지는 산업생태계의 주춧돌 하나다. 연구개발, 설계, 디자인, 마케팅 등 소위 선진국형 기술집약적 고부가 서비스 산업도 적용대상인 제조업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제조기반은 기술혁신을 위한 지식축적의 기반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난 10년 넘게 미국산업의 최대 고민은 제조 현장이 사라지면서 혁신역량이 따라 없어지는 이중 공동화현상이다. 세계 3위 파운더리 업체인 미국 글로벌파운더리스사가 2018년 7나노공정 건설을 포기하면서 미국 내 반도체 디자인 설계역량까지 떨어졌다는 지적이 대표적 사례다. 그래서 제조기반을 국가의 혁신공유재라고도 한다. 기술선진국들이 제조역량 강화를 산업정책의 핵심으로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삼성전자 등 반도체·자동차 업계 19개사 경영진을 상대로 백악관에서 진행한 반도체 영상회의에서 “이것이 21세기의 인프라스트럭처”라며 반도체 재료인 실리콘 웨이퍼를 들어올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 6월 4일 미국 백악관이 ‘미국의 공급망 회복력 구축과 제조업 활성화’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미국의 대중국 전략을 종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 2월 바이든 대통령이 행정명령으로 긴급검토를 지시한 끝에 나온 결과물이다. 삼성이 35번, 중국이 458번 언급된 문제의 그 보고서다. 미국의 안보와 경제의 운명이 걸린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제약의 4개 분야 가치사슬에서 미국 제조업의 취약점을 확인하고 정책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이 건국 이래 일관되게 유지해온 제조업 강화전략이라는 큰 틀에서 보면 이 보고서의 핵심이 더 잘 보인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안보를 최우선적인 국가적 과제로 간주하며, 강한 제조업이 바로 그 안보의 초석이라고 생각해왔다. 이런 국가전략의 틀을 만든 사람은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이자 초대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1757~1804)이었다. 해밀턴은 1791년 미 의회에 제출한 ‘미국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에서 신생국가인 미국의 독립과 안보가 제조업 역량에 달려있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해밀턴은 당시 국가적으로 중요한 15개 제조업에 대해 현황을 분석하고, 11가지 전략적 산업정책의 처방들을 제안했다. 목차 구성이나 정책 제안들이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화약의 경우 완제품 수입에 대해서는 10%의 관세를 물리되 원료인 초석과 황은 면제해서 국내 제조활동을 독려해야 한다고 제안했는데, 이는 최근까지 대만이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썼던 대표적인 정책이기도 하다. 해밀턴이 정립한 전략적 산업정책의 틀은 이후 미국이 후발주자로서 유럽 국가들을 따라잡는 데 크게 기여했다.

요 며칠 이 공급망 재편보고서의 의미를 전하는 외국 언론의 논평에서 ‘해밀턴의 부활’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해밀턴의 제안이 일관되게 미국 산업정책의 근간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혹자는 미국이 산업선진국이 된 것은 이상적으로는 자유방임과 자유무역을 표방하되, 현실적으로는 해밀턴식의 전략적 산업정책을 채택한 실용적 태도 때문으로 보기도 한다.

한미 리쇼어링 지수 추이

미국의 글로벌 산업전략과 대외무역정책도 제조역량의 글로벌 리더십 유지라는 확고한 국가전략의 기조에 맞추어져 있다. 미국은 20세기 중반까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제조역량으로 황금성장기를 누렸지만, 70년대 일본산업의 부상과 함께 제조역량 상실에 대한 위기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70년대에 컬러TV, 자동차 등 핵심 제조업에서 미·일 무역분쟁이 시작되었는데, 안보와 직결된 반도체 산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80년대 초부터 일본 기업들이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기 시작하고 미국의 반도체 제조생태계가 위기에 처하자 범국가적 대응에 나섰다. ‘제2의 진주만 공습’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칩설계보호법으로 설계역량을 키우고, 국내 생산기반을 업그레이드하는 한편, 1986년 미·일 반도체협정으로 미국 반도체의 시장을 확보해나갔다. 반도체 분쟁은 1996년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는데, 짧게 보면 10년, 길게 보면 20년 가까이 끈질기게 진행된 기술패권경쟁이었고, 본질은 미국의 핵심 제조업 기반을 지키기 위한 중장기 전략이었다.

당시에도 전자산업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적극 추진했는데, 그 최대수혜자는 한국이었다.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한국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의 대안적 공급자로서 글로벌 공급망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당시 전자업계의 관계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미국으로부터의 기술이전이 쉬웠다’고 회고할 정도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후 미국 제조업의 생태계가 위험에 처했다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다시 줄을 잇기 시작했고, 오바마 정부는 2010년 ‘제조업 역량강화법’으로 대응에 나섰다. 최근의 미·중 기술패권경쟁도 미국의 제조역량 소실에 대한 우려가 출발이다. 그러던 차에 핵심 제조물품의 국산화율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중국제조 2025계획’이 화약고로 등장했다. 결정적으로는 화웨이로 대표되는 중국의 5G 굴기와 코로나 사태 속에서 핵심 의약품 생산 차질이 도화선이 되었다. 5G망은 미래사회의 모든 규칙을 지배할 플랫폼일 뿐만 아니라 특히 국가안보의 핵심 인프라이다. 2020년도에 이미 화웨이가 이동통신장비 제조에서 세계시장의 31%를 차지했지만, 미국 제조회사들은 전무한 실정이다. 핵심 의약품이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데 중요하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이 분야에서도 미국은 연구역량은 뛰어나지만 원료공급과 제조역량에서 중국에 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조역량이 뒤처지면 기술 리더십마저 잃을지 모른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이번에 발표된 백악관의 공급망 재편보고서는 긴급하게 만들어진 대중국 보고서가 결코 아니다. 제조업이 산업생태계의 근간이라는 전통적인 국가전략의 기조 위에 제조업공동화가 혁신공동화를 불러왔다는 지난 10년간의 반성이 기초가 되어 만들어진 것이다.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린 것이 중국일 따름이다.

이번 공급망 재편보고서의 작성자는 국가안보보좌관과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이다. 제조업의 문제를 경제 문제를 넘어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본다는 증거다.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의약품의 각 챕터를 상무부, 에너지부, 국방부, 보건복지부가 나누어 작성하면서 범부처적으로 나섰다. 보조금, 연구개발투자, 교육훈련 등 전통적인 산업정책 수단뿐 아니라 특히 정부의 선도구매자로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배터리 제조기업들의 규모의 경제를 돕기 위해 모든 학교 버스의 전기화를 추진하는 계획이 대표적인 예다. 한국기업을 포함하여 외국기업들의 첨단공장 설립을 지원하는 정책도 포함되었다 국적을 따지지 않고 미국 내 제조역량을 더하는 데 모든 초점을 두겠다는 뜻이다. 동맹외교에 대한 강조는 90년대와 달리 글로벌 공급망이 극도로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무엇보다 산업계와 여야 정치권이 합심하여 이 전략을 뒷받침하기 위한 후속법안을 속속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다행히 그동안 수많은 기술자와 기업인들의 땀으로 세계에서 한 손안에 꼽히는 제조역량을 가지게 되었다. 코로나 와중에 경제의 동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그간 키워온 제조역량 덕분이다. 90년대 글로벌 공급망의 판도가 흔들리는 와중에 한국이 신산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공급망 재편 움직임도 우리에게 다시없을 재도약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업과 모든 정부부처, 그리고 정치권이 내남없이 머리를 맞대고 제조업의 기업환경과 인프라, 기술역량을 점검하는 논의의 장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제조업이 강해야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고, 제조업 하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회가 기술선진국이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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