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2위 한국, 장롱 특허만 쏟아낸다

문희철 2021. 6. 21.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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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특허 14만 건 중 6만 건 미활용
정부 출연연 올해 특허 384건 중
사업화하기 힘든 5·6등급이 58%
정부가 R&D 지원 많이 하지만
현장선 "서류작업 늘어 연구 힘들다"
스타트업에 석·박사 유치하려면
스톡옵션 양도세 등 개선 의견도


[R&D 패러독스 극복하자] 혁신창업의 길

신기술 개발 역량을 보유한 교수나 석·박사급 인력의 창업 활성화를 위해선 인사 평가에서 연구와 함께 사업화 등도 반영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국제학술 논문 표지와 합성한 이미지. [중앙포토]

딱 하나가 2등급, 10개 중 6개는 ‘장롱 특허’.

정부 출연연구기관(출연연) 소속 1만여 명이 올해 등록한 특허기술의 현주소다. 사업화로 이어지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의 지적이다.

국내 출연연을 관장하는 국가과학기술연구회(NST)에 따르면 최근 5년(2016~2020년)간 출연연이 출원한 특허 건수는 3만9263건이었다. 이 가운데 특허청에 등록된 특허 건수가 2만6513건이다. 하루 평균 14~15개꼴로 특허를 등록한 셈이다.

한국은 국내총생산(GDP) 1000억 달러 대비 특허출원 건수가 7779건(2019년 기준)으로 세계 1위다. 2위인 중국(5520건)보다 2000건 이상 많다. 하지만 성과는 ‘낙제생’ 수준이다. 특허나 논문은 많지만 ‘돈이 되는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정부 연구개발(R&D) 사업비의 70%가 집중되는 대학과 출연연이 특히 그렇다. 특허청이 지식재산 활동 실태를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국내 특허 14만1361건 가운데 활용되는 건수는 57.2%(8만823건·2018년)에 그쳤다. ‘잠자는’ 미활용 특허는 42.8%(6만503건)였다. 기업의 특허 활용률은 90.9%였지만 대학과 출연연에선 33.7%에 불과했다.

실제로 대한변리사회가 특허등급 평가시스템을 통해 올해 19개 출연연이 특허청에 등록한 384건의 특허를 분석해 보니 10개 중 6개는 ‘장롱 특허’였다. 변리사 446명이 출연연이 출원한 특허의 유효성과 범위·강도를 기준으로 10개 등급으로 나눴더니, 가장 우수한 1등급은 단 한 개도 없었다. 그나마 2등급이 1개(0.3%), 3등급 25개(6.5%), 4등급 136개(35.4%)였다. 절반 이상(57.8%)이 5·6등급이었다. 홍장원 대한변리사회장은 “사실 5·6등급 특허는 기업이 필요해서 사들일 만한 매력이 없는 ‘장롱 특허’ ‘장식 특허’ 수준”이라며 “혈세가 들어가는 국가 연구개발(R&D) 사업이 그만큼 비효율적이라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정하고 있다. 김용래 특허청장은 지난해 8월 취임하면서 “한국은 세계 1위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투자와 인구수 대비 연구인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성과는 저조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코리아 R&D 패러독스’다.

“창업자 연대보증 없애고 교수 겸직 관련 규제 풀어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과학기술 분야 지표(MSTI)’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GDP 대비 R&D 비용 비율은 4.53%로 이스라엘(4.94%)에 이어 세계 2위다. 한국은 2010년 이후 10년 내리 2위를 유지하고 있다.

R&D 경쟁력의 또 다른 한 축인 대학도 마찬가지다.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국내 대학의 기술이전 총수입은 870억원(2018년)이었다. 지난해 국내 대학 중 가장 많은 기술이전료 수입을 올린 KAIST가 100억원을 갓 넘는다. 국내 대학을 모두 더해도 미국 프린스턴대(2016년 기준 1600억원) 한 곳에 미치지 못한다.

현장에서는 “수요자 중심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갈증을 호소한다. 중앙일보는 최근 과학기술일자리진흥원과 정부 R&D 과제를 받은 공공기술 기반의 창업 기업 103곳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R&D 지원 제도의 문제점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69개 기업(67%)은 “수요자 중심의 R&D 지원체계가 부족하다”(복수응답)고 답했다. 다음으로 “중장기 전략이 없는 일회성 지원”(59.2%), “비효율적인 행정 절차”(57.3%) 등이 문제라고 꼽았다. 익명을 원한 충청권의 H사 관계자는 “갈수록 행정문서 요구가 늘어나고 있다”며 “본연의 연구보다 서류작업을 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것이 문제”라고 하소연했다.

공공기술 기반 창업기업에 물어 보니.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전문가는 기술 기반의 ‘혁신창업’이 이 같은 한계를 벗어나는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산학 R&D를 기반으로 혁신창업이 이뤄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든 이스라엘이나 핀란드·덴마크 등과 같은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연구원 창업은 국가혁신체제(NIS·National Innovation System) 차원에서, 교수 창업은 지역혁신체제(RIS·Regional Innovation System)를 바탕으로 분리해 지원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왔다. 김영환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교수 창업은 지역 연고를 바탕으로 현지의 기업과 협력을 통한 기술이전이나 창업 성과가 높게 나타나고, 연구원 창업은 국가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연구소 기업으로 주로 나타난다”며 “이에 맞는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중앙일보의 연중 기획 ‘혁신창업의 길’ 자문위원인 오세정 서울대 총장과 이광형 KAIST 총장은 창업의 걸림돌이 되는 낡은 규제를 빨리 풀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광형 총장은 “창업자에게 무한책임을 묻는 연대보증의 경우 정책금융에서는 풀었지만, 민간 금융회사에서는 여전하다”며 “이 같은 연대보증을 불공정 거래로 간주하고 무효화할 수 있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세정 총장은 “교수들이 적극적으로 창업에 나서기 위해서는 1주일에 하루, 8시간만 겸직을 허용하고 있는 규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축적의 길』저자)는 “혁신창업 스타트업에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소득세와 양도세 규제를 유지하고 있는 스톡옵션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며 “뛰어난 석·박사 인재가 연봉도 적고, 실패 확률도 높은 스타트업에 뛰어들 땐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문희철·권유진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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