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호정] 벤투호, 빌드업을 걷어내면 보이는 것들

서호정 기자 2021. 6. 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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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풋볼리스트] 서호정 기자 = 빌드업은 한국 축구의 콤플렉스 중 하나다. 기술적, 방법적으로 미진했던 시대를 소위 '뻥축구'로 불리우는 단조롭고 확률 낮은 방식과 개인 전술에 의존하며 돌파해 갔다. 외국인 지도자의 입성, 기술을 강조하는 국내 지도자들을 통해 방법론이 확장되고, 공유되기 시작하며 흐름은 바뀌었다. 많은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유럽으로 나아가고, 어떤 전술적 흐름이 선도되는지 팬들이 파악하기 수월해지자 세밀한 빌드업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최근 10년 동안 빌드업이 과거의 패스 플레이나 패싱게임을 대체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는 가운데 오남용도 생겼다. 빌드업 그 자체가 전술이나, 축구 철학으로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현재 A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파울루 벤투 감독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취임 당시부터 지금까지 그가 지향하는 축구는 '공격적으로 볼을 점유하고, 경기 흐름을 지배해 위기 상황을 줄이며, 우리가 의도한 과정을 통해 골을 넣는 것'으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여기서 '빌드업'은 '의도한 과정' 부분에 해당되는데 언젠가부터 그의 축구 자체가 '빌드업 축구'라는 표현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벤투 감독의 축구에 대한 토론은 이어져야 한다. 레바논 원정이나 한일전 참패에서 드러난, 벤투 감독이 지향하는 축구 그 자체가 작동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분석도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게 그가 '빌드업 축구'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논제와 가정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방법론 중 하나를 스타일과 철학으로 혼동하는 함정에 빠졌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실제로 지난 13일 레바논전 2-1 역전승으로 끝난 국내에서의 2차 예선 3경기에서는 벤투 감독이 추구하는 축구가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로테이션이 크게 가동됐고, 상대 전력이 아시아 최하위권인 스리랑카전은 차치해도 레바논을 꺾을 정도로 복병이었던 투르크메니스탄을 상대로 한 완승, 그리고 선제 실점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나왔지만 결국 그것을 극복한 레바논전 역전승은 이전의 답답한 경기들과 달랐다. 


다양한 빌드업, 그리고 그것을 받치기 위한 다른 전술적 준비와 선수들의 역량이 어우러진 경기였다. 벤투 감독의 축구가 제대로 작동됐다는 차이점을 확인하려면 빌드업이 잘 됐다가 아니라 다른 부분의 개선까지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월드컵 2차 예선에서 부진했던 경기(북한 원정, 레바논 원정)들과 가장 큰 차이는 공간 활용이었다. 아시아권에서 한국 축구는 아시안컵 본선 토너먼트나 월드컵 최종예선에서도 상대의 밀집 수비에 서게 된다. 특히 확률 높은 슈팅 기회를 잡아야 하는 페널티박스를 중심으로 8명 이상이 2중, 3중으로 막을 치는 상황에서 벤투 감독뿐만 아니라 전임 감독들도 좀처럼 공간 확보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사실 최근의 축구 기조에서 모든 감독이 당면한 과제다. 전력 차가 명확해서, 혹은 절대 놓칠 수 없는 경기 비중 탓에 각 팀들은 실점을 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페널티박스 안팎의 공간 장악을 택한다. 한국이 월드컵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부딪히는 고민이, 본선에서는 전력 상 우위인 상대를 공략하기 위한 전술 모델로 치환되는 역설적 상황이 대표적이다. 지난 러시아월드컵 독일전에서 신태용호는 우리 진영 아래 1/3 공간을 철저히 지배했고, 조현우의 선방으로 버틴 끝에 추가시간 3분 사이 2골을 넣으며 '카잔의 기적'을 쓸 수 있었다. 


벤투 감독은 정석을 택했다. 최전방의 원스트라이커와 측면 공격수, 2선 중앙 미드필더의 스위칭 플레이를 통한 공간 창출이었다. 5명의 전방과 2선의 선수에 2명의 풀백까지 올려 7명의 선수가 상대 수비를 밀어부쳤다. 특히 풀백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의도적으로 중앙에 더 밀집했다. 이때 수비진을 교란하며 생기는 공간을 공략하기 위한 조직적 움직임이 잘 수행됐는데 투르크메니스탄전과 레바논전에서 상대 풀백 뒤, 그리고 측면과 중앙 사이의 하프스페이스 공략이 벤투 감독 부임 후 가장 잘 이뤄졌다. 


벤투 감독은 풀백의 역량을 굉장히 중시해 왔는데, 그 이유가 이번 2차 예선 3연전에서 드러났다. 풀백이 드리블, 주력을 활용한 개인 전술에서 상대 풀백과의 전면전을 맞는 상황을 빠져나와야 상대 밀집 수비의 밸런스를 무너트리며 공간이 생긴다. 이번 3연전에서 좌우 측면의 주전이었던 홍철, 김문환은 이 역할을 잘 수행했다. 


하프스페이스로 침투하는 선수들의 약속된 움직임도 좋았다. 벤투 감독은 황의조, 손흥민, 권창훈, 남태희, 이재성 등 온더볼과 오프더볼 능력이 고루 좋은 선수들을 선호하지만 예전에는 이들이 고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번 3연전의 결정적 차이는 약속된 움직임과 그것을 완성시키는 콜 플레이였다. 하프스페이스로 들어가는 손흥민, 이재성, 권창훈 등은 공간으로 움직일 때마다 자신의 위치를 말이나 손을 통해 확실히 후방에 전달했다. 


그에 맞게 들어오는 크로스나 침투 패스의 타이밍도 전보다 개선됐다. 특히 홍철의 왼발이 빛났는데 상대가 대비하는 타이밍보다 반박자 빠르게 들어오는 크로스는 1차 공격, 혹은 2차 공격으로 상당한 이득을 이끌었다. 현재 대표팀의 왼쪽 풀백 자원 중 크로스가 가장 뛰어난 선수인데 왜 벤투 감독이 지난 한일전에서 논란을 일으키며 몸 상태가 완전치 않았던 홍철의 소집을 강행했는지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이러한 플레이에서 손흥민은 조력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시아 무대에서 최소 2~3명의 집중 마크를 기본으로 감당해야 하는 손흥민을 역이용하면 수비를 가장 크게 흔들 수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전의 경우 그런 손흥민 활용법이 잘 이뤄졌다. 이전 2차 예선 경기들에서 손흥민은 하프라인 부근까지 내려와 공을 배달하고, 전환 장면에서 길게 스프린트 하는 상황이 나왔는데 투르크메니스탄전에서 손흥민은 박스 안팎에서 짧은 침투와 효율적인 연계, 1대1 상황에서의 우월한 기술을 활용했다. 손흥민이 박스 안에서 상대 수비 2~3명을 끌어올 때 역으로 나는 공간을 황의조, 남태희, 권창훈은 확실히 활용하며 득점을 만들었다.  


레바논전은 이런 축구가 크게 꼬일 뻔했다. 풀백의 과감한 전진 과정에서 치명적 실수가 나오면서 전반전에 허용한 유일한 슈팅이 실점으로 이어졌다. 2명의 센터백과 수비형 미드필더 정우영 3명이 실질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대 카운터에 대한 갑작스러운 노출은 밀집 수비를 깨기 위한 방식 이면에 있는 위험성이다. 우리 진영에서 전개를 할 때의 턴오버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다. 


6월의 2차 예선 3경기를 앞두고 벤투 감독은 아시안컵 이후 2년 6개월 만에 유럽파를 포함한 베스트 멤버로 일주일의 훈련 시간을 보장받았다. 일찌감치 귀국한 유럽파는 충분히 회복과 준비를 했는데, 이는 실질적인 훈련을 거의 못하고 곧바로 경기에 들어가야 했던 이전 A매치와는 확실히 다른 결과의 내용의 개선으로 이어졌다. 지나친 낙관론은 금물이지만, A대표팀의 전술적 개선을 가져올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며 터닝포인트로 삼은 것은 인정받아야 한다. 여기에 송민규, 정상빈처럼 확실한 클러치 능력을 가진 젊은 선수를 체크하며 향후 최종예선에서 후반에 흐름을 바꿀 카드까지 확보하며 벤투 감독은 2차 예선을 마무리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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