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파 데이비드 프리드리히..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아버지

2021. 6. 17.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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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아의 '컬렉터의 마음을 훔친 세기의 작품들']

최근 들어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부쩍 많아졌다. 미술품, 부동산, 주식, 가상화폐 등 다양한 투자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엄청나게 자산을 불리는 동안, 자신만 뒤처진 것 같은 불안감이 주요 원인이다.

이렇게 요동치는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는 마음의 평화를 찾는 자신만의 방법이 꼭 필요하다. 채워지지 않는 물질적 욕망으로 지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조화를 찾기 위해서 매우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유독 눈길이 가는 화가가 한 명 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카스파 데이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년)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Der Wanderer ber dem Nebelmeer, 1818년)’. 결혼으로 자신의 가정을 일구면서 가장 활기찬 느낌을 구가하던 전성기 시절의 작품으로 함부르크미술관 소장품이다. ‘달을 사색하는 남녀(Mann und Frau in Betrachtung des Mondes, 1824년)’. 어두운 색조의 풍경화 속에 영생과 내세에 대한 희망을 담은 이 작품은 베를린 소재 국립미술관 소장품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는 물안개로 뒤덮인 산 정상에서 광활한 풍광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화폭에 담은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1818년)’라는 그림이다. 가장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등장인물이 관객을 등지고 서 있다는 점이다. 미술사에서 완전히 뒤돌아 얼굴을 전혀 보여주지 않는 그림을 그린 것은 프리드리히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표정을 볼 수 없으니 인물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안개에 뒤덮인 드넓은 풍경을 바라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가 일궈낸 혁신의 핵심은 풍경화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에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기 위한 고전적인 풍경화 개념과 달리, 그는 자연에 대한 사색을 통한 신과의 영적 결합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작품은 ‘숭고미’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처럼 프리드리히의 풍경화에서 인물은 대부분 뒷모습이나 실루엣만으로 표현된다. 이로써 인간이 아니라 자연을 그림의 서정적 주체로 부각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뒷모습을 보이는 인물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해 풍광을 통해 자연의 숭고한 잠재력을 경험하고, 삶에 대한 깊은 사색과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유도한다.

왜 그는 자연을 통한 사색과 영적 체험을 그토록 중시하게 됐을까.

‘해 질 녘의 산책(Spaziergang in der Abendd mmerung, 1837~1840년)’. 이 작품은 1993년 5월 20일 크리스티 런던 경매에서 230만영국파운드(약 40억원)에 낙찰돼 그의 전작 가운데 가장 높은 경매가를 기록한 바 있다.
우선 당대에 유행하던 낭만주의의 영향을 들 수 있다. 터너나 컨스터블 같은 이 시기 화가들은 인간이 만든 인공적인 세상에 대한 반발로써, 자연을 신성한 창조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이들이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화가의 내적, 정서적 세계의 묘사를 중시했다는 사실이다. “예술가는 자기 눈앞에 보이는 것을 그리기만 해서는 안 되고, 자신 안에서 보는 것을 그려야만 한다”는 프리드리히의 말처럼. 즉, 신성한 창조물인 자연에 대한 사색적, 정서적 반응이 그의 풍경화 주제였던 셈이다.

그가 자연에 대한 사색과 이를 통한 영적 체험과 치유를 중시하게 된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어린 시절의 비통한 경험에 있다. 열 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불과 일곱 살에 어머니 죽음을 목도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듬해에는 여동생이 죽었고, 또 5년 뒤에는 남동생이 익사하는 것을 봤다. 얼어붙은 호수에 얼음이 깨지면서 사고를 당한 것인데, 자신도 위험에 처한 탓에 구할 수가 없었다. 4년 뒤에는 누이가 전염병으로 숨졌다. 이런 경험은 죽음을 면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을 초월하는 마음의 평화와 인생의 해법을 찾으려는 그의 회화 경향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그의 풍경화에는 죽음의 비통함과 어두운 그림자가 내재하는 동시에 그것을 초월하는 숭고한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다.

일례로 ‘달을 사색하는 남녀(1824년)’는 나무와 숲 전체 그리고 실루엣으로 묘사된 인물들이 모두 어두운 색조로 칠해져 어딘가 음침하고 우울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대조적으로 그 너머 옅은 보랏빛의 신비로운 하늘과 밝은 노란색의 달은 힘든 이생 너머의 영생과 내세에 대한 희망을 약속하는 듯하다. 달을 보며 상념에 잠긴 두 남녀를 통해 프리드리히는 자연은 신의 발현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우의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말년으로 갈수록 더욱 강해지는데, 이는 힘들었던 그의 삶 탓도 크다. 사실 화가로서 그는 이른 전성기를 맞이했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미술에도 관심이 많아 바이마르 대회를 조직한 바 있는데, 이 대회에 두 점을 출품해 상을 받으면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큰 인기를 누리지만 말년으로 갈수록 기괴하고, 침울한 데다가, 고요함에 대한 사색적인 묘사가 지나치게 낭만주의적이고 구태의연해 근대를 향하는 시대 흐름에서 벗어난다고 혹평받으면서 잊혀진다.

사후에도 오랫동안 잊혀진 그의 작품은 1906년, 베를린 전시를 통해 재조명된다. 이후 1920년대 표현주의자에게, 1930년대에는 초현실주의자에게 큰 영감을 주면서 재평가됐다. 하지만 나치가 ‘피와 땅(Blut und Boden)’이라는 자신들의 슬로건 홍보에 그의 작품을 이용하면서 나쁜 이미지가 씌워져 다시 추락한다. 결국 독일 낭만주의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진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프리드리히의 예술 세계는 외부적인 편견 없이 순수하게 다시 평가를 받게 된다.

말년에 그린 ‘해 질 녘의 산책(1837~1840년)’은 힘든 삶 속에서도 그가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황혼 무렵 한 남자가 무덤으로 보이는 큰 돌 앞에서 묵념을 하고 있다. 깊은 상념에 젖은 이 남자는 아마도 몇 번의 뇌졸중 이후, 바싹 다가선 죽음에 대해 명상하는 프리드리히 그 자신이리라.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의 이 그림에서도 그는 영생을 의미하는 신비로운 하늘과 희망을 상징하는 달을 그려 넣음으로써, 내세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평정심을 보여준다.

[정윤아 크리스티 스페셜리스트]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13호 (2021.06.16~2021.06.22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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