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가 선물한 시계, 내 방 실시간 찍던 몰카였다"

박은주 2021. 6. 17.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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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와 무관한 사진. 국민일보DB


“판사는 ‘합의를 하지 그러냐? 재판이 계속 진행되면 너한테 좋을 것이 없다’라고 했어요.”

국제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HRW)가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인 이예린(가명)씨와 지난해 2월 6일 진행한 인터뷰의 일부다. 이씨는 직장에서 자신에게 추근대곤 했던 유부남 상사에게 불법촬영 피해를 당했다. 어느 날 상사가 선물한 탁상형 시계가 화근이었다. 그 시계에 카메라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이씨는 한 달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 사이 상사는 이씨의 방을 촬영하고, 휴대전화를 통해 실시간으로 촬영물을 봤다.

이씨가 피해를 눈치채며 상황이 종료되는 듯했지만 법정에서 그를 더 괴롭게 한 2차 가해성 발언이 쏟아졌다. 이씨는 판사가 합의를 종용했다며 “어떻게 판사가 감히 피해자에게 합의하라고 말할 수 있나. 도대체 판사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나”라고 분노했다.

가해자인 직장 상사는 1심에서 징역 10개월 형을 받았다. 그러나 이씨는 여전히 우울증과 불안증 약을 복용하고 있다. 그는 “밤마다 울었다. 잠도 못 자고 진정제를 먹어야 했다”면서 “때로는 아무 일 없는데도 내 방에서 이유 없이 너무 무서울 때가 있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16일 디지털 성범죄 피해로부터 ‘생존’한 여성 12명과 정부·민간 전문가 등을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심층 면담한 보고서 ‘내 인생은 당신의 포르노가 아니다: 한국의 디지털 성범죄’를 공개했다. 피해자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이나 익명으로 처리됐다.

“기소할 거냐” 묻는 검사…디지털성범죄 불기소율 43.5%

보고서에 따르면 피해자들은 대부분 경찰, 검찰, 법원 같은 수사·사법 기관에서 2차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했다. 한 피해자는 “가해자가 500만원도 안 되는 벌금형을 받을 건데 그래도 (기소를) 하실 건가요”라는 질문을 검사로부터 받았다고 한다.

또 다른 피해자는 관할 경찰서 사이버범죄 수사단이 범죄물에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 것에 분노해 “내가 이걸로 신체적 손상을 입어야만 조치를 할 거냐”고 물었다가 “그렇다”는 대답을 들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피해자는 “때로는 범죄 자체보다 경찰의 대응 방식 때문에 더 상처를 받는다”고 호소했다.

보고서는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 겪는 2차 피해는 가해자가 받는 처벌의 수준 때문에 더욱 증폭된다고 분석했다. 경찰이 가해자를 체포해 검찰로 넘긴 사건 중 절반 가까이는 불기소 처분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2019년 검찰은 성범죄 사건의 46.8%에 대해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같은 기간 불법 촬영과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불법촬영물 제작·유포 사건에 대한 불기소 처분율은 43.5%로 집계됐다. 살인 사건(27.7%)이나 강도 사건(19.0%)의 불기소 처분율을 두 배 가까이 웃도는 수치다.

보고서는 다만 정부가 지난해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기 이전의 상황만을 반영한 것이어서 이후의 처벌 현황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여러 명 불법촬영해도…‘초범’이라 솜방망이 처벌

보고서는 검찰이 기소해 재판이 진행되더라도 법원이 선고한 형량 역시 디지털 성범죄 피해의 심각성에 비해 가벼운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디지털 성범죄로 체포된 가해자 5437명 중 2.2%(119명)만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남자친구가 자신과 다른 여성들을 불법 촬영한 사건을 겪은 박지영씨는 “전 남자친구는 법정에서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아주 최소한의 처벌만 받았다”며 “‘(범죄가) 처음이고 미래가 유망하다’는 이유였다”고 했다. 박씨의 전 남자친구가 받은 처벌은 300만원의 벌금형이 전부였다.

최지은씨의 가해자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이 남성 가해자는 인근 건물 지붕에서 2주간 최씨와 최씨 집 내부를 촬영했다고 자백했다. 최씨는 “판사가 남자였는데, 최종 판결문에서 ‘직업이 있고, 최근에 결혼했고,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기가 아주 어려웠다’면서 집행유예를 선고했다”고 말했다.

“경찰·검사·판사 대상 교육 실행돼야”

보고서는 “형사상 대응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가해자가 받는 처벌이 생존자가 겪는 피해 수준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대부분의 가해자에게 선고되는 형량이 지나치게 낮아 생존자들이 신고를 포기하게 만든다”면서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 경우에도 이 범죄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상을 준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경찰청, 대검찰청, 대법원을 향해 사법기관이 디지털 성범죄의 심각성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도록 피해자들에게 끼치는 영향에 대해 교육하라고 권고했다.

특히 경찰을 상대로 성인지 감수성과 재트라우마에 대해 교육하고, 젠더폭력 신고자 등 민원인을 부당하게 처우하는 경찰관에게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판사들을 대상으로는 성평등, 젠더감수성, 젠더폭력의 영향에 대한 교육을 하라고 촉구했다.

아울러 피해자들이 불법촬영물 삭제와 심리치료 등으로 경제적 피해까지 생기지 않도록 ‘민사상 구제책’을 개선해야 한다는 제안도 내놨다. 구체적으로 불법촬영물 삭제에 드는 비용을 가해자가 부담하고, 가해자에게 삭제의 책임을 부과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또 피해자가 고스란히 감당하는 정신적 피해 관련 비용과 몰래카메라 탐지 의뢰 비용, 보안 관련 비용, 이사 비용 등에 대해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 이를 지원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불법 촬영물 삭제를 거부한 인터넷 플랫폼을 상대로 피해자가 소송을 제기할 때에도 이를 지원하는 제도가 도입돼야 한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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