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미국 주도 반도체 연합체에 들어가야 산다
반도체 공장, 동아시아 집중 심각
중 견제 위한 기술·장비 금수 조치
인력 양성이 기술 우위 유지 비결
모습 드러낸 미국 반도체 전략
주요 7개국 (G7) 회의 사흘 전인 지난 8일 미국 백악관은 반도체 등 4대 핵심 분야에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전략 보고서에서 주목되는 대목은 반도체 관련 부분이었다. 메모리칩 수출에 사활을 걸다시피 한 한국으로서는 미·중 반도체 대전의 향방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미 상무부가 작성한 60 쪽짜리 전략 보고서를 토대로 반도체 대전의 현주소와 함께 바람직한 한국의 대응 방안을 짚어본다.
반도체 대전의 서막
코로나19에 결정적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선 반도체도 예외는 아니었다. 관련 기업들은 예상보다 코로나가 심각해지자 2020년 말 재택근무와 관련된 컴퓨터·팩시밀리 등 PC 및 사무제품용 반도체의 수요는 급증할 거로 내다봤다. 반면 개인들의 외출이 줄면서 마진은 박하면서도 기술 수준은 낮은 차량용 반도체는 덜 팔릴 거로 예상했다. 반도체 업체들이 PC 및 사무용품용 생산은 늘리는 반면 자동차용은 줄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예상외로 자동차 수요가 빠르게 회복하면서 올 초부터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이 빚어졌다. 반도체는 특성상 주문부터 납품까지 최대 6주가 걸린다. 수요가 늘었다고 바로 만들어 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 올 2월 텍사스를 강타한 태풍으로 미 반도체업체 NXP의 생산라인이 크게 망가졌다. 그 직후인 지난 3월엔 전 세계 차량용 마이크로컨트롤러의 30%를 생산하는 일본 반도체업체 레네사스에 불이 나 생산이 중단됐다. 설상가상으로 50년 내 최악의 가뭄이 대만을 덮쳐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겼다. 반도체 제조 과정에서는 수많은 화학제품이 사용되며 이를 씻어내야 하는 탓에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가뭄으로 물을 못 구하게 된 대만 업체들도 어쩔 수 없이 생산을 중단하게 됐던 것이다. 잘못된 수요 예측에다 각종 재해로 차량용 반도체는 유례없는 기근을 겪게 된다.
이같은 차량용 반도체 부족 현상은 전 세계 자동차 산업에 결정적 피해를 낳았다. 올 한해만 1100억 달러 (122조여원)의 손실이 난데다 생산량도 400만대나 줄었다. 다른 분야의 피해도 막심했다. 무려 160여개의 산업이 반도체 부족의 피해를 겪어야 했다. 이같은 사태로 비상이 걸린 바이든 행정부가 안정적 반도체 확보를 국가적 과업으로 삼고 대응 전략을 짠 것은 순리였다.
'산업의 쌀'에서 '안보의 기틀'로
반도체는 발명 이래 '산업의 쌀'로 불려왔다. PC·핸드폰과 가전제품은 물론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전기가 사용되는 제품치고 반도체가 안 들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을 지경이다. 얼마나 정밀한 반도체가 사용됐느냐에 따라 제품의 성능이 갈릴 정도다. 특히 위성항법장치(GPS)까지 장착하는 등 갈수록 정밀해지는 첨단무기에는 수많은 반도체가 들어간다. 반도체 능력이 첨단무기의 성능을 좌우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이와 관련, 주목해야 할 대목은 군사적 활용으로 철 지난 반도체도 중시된다는 점이다. 예컨대 지금도 활약 중인 B-2 스텔스 전폭기가 처음으로 제작된 해는 1987년. 무려 34년 전 제품이라 여기에 쓰인 반도체도 당연히 구형이다. 2~3년만 지나면 고물 취급받는 반도체와는 달리 군사 장비는 보통 수십 년씩 쓰도록 만들어졌기에 구형 부품을 만드는 설비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바이든 행정부는 원활한 반도체 공급을 최우선적인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한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아시아 집중이 문제"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공급 문제를 ▲설계 ▲제조 ▲조립·검사 ▲ 재료 ▲ 장비 등 5개 분야로 나눠서 접근했다. 이중 설계 및 장비 분야에서는 미국이 여전히 압도적인 우위를 자랑했다. PC의 두뇌 격인 CPU의 경우 인텔·AMD 등 미 회사가 설계 시장의 100%를 장악하고 있으며 메모리 설계 분야에서도 적잖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 반도체 장비에서도 미국은 전체 시장의 41.7%를 차지해 31.1%를 기록한 일본을 앞서고 있다. 반면 조립 및 검사는 요구되는 기술 수준이 높지 않아 대체 가능하며, 재료 역시 특정한 국가나 기업이 독점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 별 지장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큰 문제는 반도체 제조 분야다. 현재 첨단 반도체는 시스템·메모리를 통틀어 대만·한국·중국 등 동아시아 국가들이 대부분 만든다. 첨단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대만이 92%, 메모리는 한국이 44%, 중국이 14%를 차지한다. 따라서 미국은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이 지역 반도체 생산이 멈춰 자국 경제에 엄청난 피해가 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실제로 대만의 반도체 공장이 서면 미 전자산업 전반에 5000억 달러 (558조 여원)의 손해가 날 거로 추산됐다.
미국의 반도체 중흥 정책
한때 세계 최대의 반도체 생산국이던 미국의 위상은 급락했다. 1990년 전 세계 생산의 37%를 차지했던 미국 반도체 점유율은 최근 12%로 떨어졌다. CPU·GPU 설계 분야에서는 여전히 압도적 1위이지만 메모리 생산은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바이든 행정부는 다각도의 전략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우선 반도체 공장의 미국 내 유치다. 삼성·TSMC 등 해외 기업의 유치는 물론, 외국에 나가려는 미 업체를 붙잡기 위해 미 정부는 500억 달러 (55조여원) 규모의 지원금을 준비하고 있다.
또 해외 고급 인력 확보를 위해 취업 비자 발급을 대폭 늘릴 계획이다. 미 반도체 분야 내 고급 인력의 60%가 외국 출신인 까닭이다.
아울러 중국을 뿌리치기 위한 정책도 강화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국가안보 차원에서 첨단 반도체 기술 및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하는 한편 직접 투자도 규제하고 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이런 와중에 중국은 2014년 이래 국운을 걸고 반도체 독립을 위해 매진하고 있다. 당시 1387억 위안(24조여 원) 규모의 반도체 펀드를 만든 뒤 생산 설비 및 기술 확보를 위해 돈을 쏟아부었다. 인력 확보의 타깃은 한국과 대만이었다. 한국 퇴직 기술자들에겐 '1·5·3룰'을 적용, 옛 연봉의 다섯배를 3년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데려갔다. 대만 엔지니어의 경우 연봉의 세배를 주고 3000명이나 스카우트했다. 이 때문에 대만 정부는 사전 허가 없이는 중국 기업이 채용 활동을 하지 못하게 했다.
중국 정부의 '반도체 밀어주기'는 보조금 지급을 금지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규정 위반 시비를 불렀다. 하지만 중국은 정부가 사실상 통제하는 벤처 캐피탈의 투자 형식으로 반도체 기업들을 지원, 교묘하게 금지 규정을 피해 나가고 있다. 정부 보조금이 아닌 벤처 캐피탈의 투자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이다. 간접적인 중앙정부의 지원 외에도 성(省) 등 지방정부 차원의 보조금도 막대하다.
중국 정부는 또 수직적인 시너지 효과가 나도록 적극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거대한 반도체 기업군을 탄생시키고 있다. 실제로 2014년까지 전무했던 반도체 관련 기업 간의 통합은 이후 25건에 달한다.
이런 가운데 중국은 2019년 처음보다 약 1.5배나 되는 2041억 위안 (35조여 원) 규모의 2차 반도체 펀드를 조성, 경쟁력 확보를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위기에 놓인 한국 반도체
반도체 중흥을 위해 총력을 쏟고 있는 미·중 사이에서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하나. 반도체공학회 부회장 유재희 홍익대 교수는 지난 16일 "기술 선진국인 미국도 설계·제조·소재·패키징 및 장비 등 모든 분야를 할 수는 없어 여러 나라로 이뤄진 반도체 연합체를 구성할 공산이 크다"고 진단했다. 반도체 시스템 설계 분야의 권위자인 유 교수는 이어 "미국이 원천 기술, 지적 재산권은 물론 설계 소프트웨어와 주요 생산 장비를 가장 많이 장악 중인 만큼 일단은 미국 주도의 반도체 연합체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중국 시장이 워낙 큰 만큼 "미·중 관계가 악화해 중국이 별도 표준을 만들 경우에도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이를 위해서는 "압도적인 기술적 우위가 중요하며 무엇보다 고급 인력 양성이 필수적"이라고 유 교수는 역설했다.
그는 달라진 풍토를 안타까워했다. "반도체 사업 초기에는 한국 기업들도 핵심 엔지니어들을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잃을 것을 걱정해 한 차에 태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이어 "이제 그런 풍토가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반도체 인력 양성을 위한 정부 투자가 줄어 필요한 인재를 구하지 못하는 형편"이라고 걱정했다. 따라서 "국내에서 반도체 필수 인력을 양성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외 인력을 아웃소싱할 수 있는 체계도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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