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엔젤이 부러운 개미들께
“이제 웬만해선 50세 이상하고는 안 만나려구요.”
나이 50을 넘긴 그가 할 농담인가, 싶었지만 더 들어보기로 했다. 엔젤투자자 A는 코로나를 겪으며 생각을 굳혔다고 했다. 유한한 시간과 돈, 젊은 창업자들에게 쓰고 싶다고 했다. 가진 건 많지만, 도전하고 싶은 건 별로 없는 이들과는 만날 이유가 줄어든 모양이었다. A가 마냥 퍼주는 ‘키다리 아저씨’는 아닐테니…. 음, 실행하는 젊음에 투자하는 게 생산적이란 얘기로 들렸다.
그럴 만도 하다. 유망한 초기 스타트업에 애정이 많은 A는 최근 잇따라 장기투자의 결실도 맺었다. A를 비롯한 엔젤들이 5~10년 전 종잣돈을 지원한 스타트업이 몸값 수천억대 기업이 됐고, 엑시트(exit, 투자금회수)에 성공했다.
A같은 엔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패션계의 페이스북’을 만들겠단 대학 4학년생의 꿈이 기업가치 3000억짜리 스타일쉐어(무신사가 인수)로 영글지 못했을지 모른다. 미디어사업에 대한 청년의 야망이 웹소설 플랫폼 ‘래디쉬’(카카오가 5000억원에 인수)로 진화하는 길에도 A와 장기 투자자들이 있었다.
또 다른 엔젤투자자 B도 국내외 유명 스타트업들의 ‘1호’ 투자자다. 이커머스 티몬, 몸값 4조원에 이르는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눔(noom), 최근 제도권 진입에 성공한 P2P 핀테크 업체 렌딧 등등. B에게 투자원칙을 물었다. “똑똑한 ‘똘아이’가 이끄는 팀”이란 답이 돌아왔다. 유행 좇지 않고, 자기 신념·의지에 따라 도전하는 팀에 장기 투자한다고. ‘그런 팀이라면 가장 먼저 믿어주는 1호가 되자’는 것도 B의 원칙이다.
‘암호화폐로 며칠 만에 몇 천을 벌었다’ ‘1년 새 집값이 두 배 됐다’는 소리에 기가 질리는 세상에서 엔젤투자는 우아한 사치일까. 돈 많고 인맥 좋은 IT 자산가들이나 할 수 있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엔젤투자에 몰려든 보통 사람들이 역대 최대라고 한다. 5년 전 1132억원이던 엔젤펀드(개인투자조합) 운용 규모가 올 상반기 1조원을 돌파했다. 제도가 생긴 지 20년 만. 급증한 ‘개미 엔젤’의 힘이다. 물론, 시중에 돈이 많이 풀렸고, 스타트업 성공담이 잇따른 영향도 있다. 정부가 2018년부터 엔젤투자에 대한 소득공제를 확대해준 효과도 있다. 어쨌든, 스타트업에 돈이 흐르는 건 반가운 일이다.
다만, 알아둘 게 있다. 엔젤이 되고픈 개미이거나, A나 B의 투자수익률이 부러운 분들이 참고할 얘기다. 고수 엔젤들은 대체로 “투자금을 회수 못해도 아깝지 않을 팀에 투자한다”고 한다. ‘그래서 잃은 적이 많냐’ 물어보면, 그렇지도 않다고. “그런 팀은 실패하고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진화하더라,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개미 엔젤이라면 자신의 투자원칙부터 따져보자. 그렇지 않으면, ‘왜 너희는 ○○ 같은 상장 대박을 못 내느냐’고 창업자를 몰아세우는 ‘진상’ 블랙 엔젤이 될지도 모른다.
박수련 팩플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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