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범의 문화탐색] 벽의 해방에서 벽화의 해방으로
유행 지나쳐 공해로 전락
벽 해방시키는 벽화 필요
달은 가장 오래된 TV, 벽은 오래된 화면
백남준의 말처럼 달이 가장 오래된 TV라면, 벽은 가장 오래된 화면이다. 최초의 벽은 자연이었다. 그로부터 암벽화와 동굴벽화가 탄생했다. 건물 벽화가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서양은 벽화를 아주 선호했는데, 회화가 건물의 벽면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타블로(tableau)’라고 부르는 목판이나 천으로 된 이동식 화면이 발명되는 중세 말기부터다. 동아시아에서는 일찍부터 비단과 종이 같은 소프트한 매체가 발달했기 때문에 서양 미술사와는 다른 전개를 보여준다.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서를 막론하고 벽화가 오랫동안 미술의 한 장르로서 사랑받아온 것은 사실이다.
한국의 벽화라고 하면 보통 고구려 고분 벽화나 사찰 벽화를 떠올리겠지만, 정작 현대적인 의미의 도시 벽화가 등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도시 벽화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80년대 일군의 민중미술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미술의 대중성과 실천성을 담보해줄 매체로 벽화에 주목했는데, 이처럼 한국의 현대 벽화는 민중미술 운동의 일환으로 시작되었다.
벽화, 민중미술 거쳐 공공미술로
그러다 보니 권력과 충돌하는 일도 잦았다. 1986년은 한국 미술사에서 벽화 수난의 해로 기록된다. “그해 7월 서울 신촌역 앞 건물 벽화를 시작으로 8월엔 정릉 벽화, 11월엔 경기도 안성 벽화가 채 완성도 되기 전에 잇따라 당국에 의해 강제로 지워졌다.”(‘민중벽화 완성 전에 강제 철거’, 중앙일보 1991년 10월 4일 자) 권력은 민중미술인 벽화를 불온하게 여기고 탄압했다. 철거의 근거는 광고물법 위반이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도 어느덧 기억 속에서 지워지고, 이제 벽화는 탄압의 대상이기는커녕 도시 환경 미화의 수단이자 공공미술로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아니 실은 그 정도가 아니라 범람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지방자치제가 실시되고 지역마다 공공 미술과 공공 디자인 붐이 일면서 벽화 그리기가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몇몇 지역에서는 벽화마을이 생겨나고 관광 명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벽화에 대한 안일한 접근과 자원 봉사니, 주민 참여니 하는 식의 아마추어리즘으로 인해 조잡한 벽화가 넘쳐났고 그러다 보니 ‘벽화 공해’라는 말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미술운동으로 시작된 한국의 벽화는 이제 또 다른 벽에 부딪혔다. 벽화는 무엇이며 왜 그려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얼마 전 새로 이사 간 동네를 어슬렁거리다가 골목 안에서 벽화를 하나 발견했다. 얼핏 보기에는 흔한 어린이 낙서 같은 벽화였는데, 자세히 보니 거기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들리는 듯 살아 있었다. 이 벽화가 만들어진 경위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주민을 동원해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골목 안에는 오래전부터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흘러넘쳤을 것이고 벽화는 그것을 꾸밈없이 그대로 담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떠올랐다. 미켈란젤로 자신은 조각을 한 적이 없으며, 다만 돌을 보면 그 안에 갇힌 형상이 자신을 꺼내달라고 호소하는 것이 보였고, 그는 그 형상을 돌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끌과 망치를 들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미켈란젤로의 ‘노예’ 연작 역시 그렇게 탄생했다.
정체성 없는 벽화마을 넘쳐나
그렇다. 벽화는 벽을 해방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벽화는 그저 거기에 있는 벽 위에 무언가를 그려 넣는 것이 아니다. 벽 안에 들어 있는 삶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아무런 개념도 맥락도 없이, 공공미술이라는 미명하에 자행되는 벽화 그리기는 추방되어야 한다.
지금 전국에 걸쳐 ‘예술 뉴딜 프로젝트’(문화체육관광부 주최)가 추진되고 있다. 코로나로 인한 예술가 지원이 명분이지만, 그 내용은 공공미술이며 이 사업에도 벽화 프로젝트가 적지 않게 들어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는 기존의 안이한 접근을 벗어나야 한다. 벽을 볼모로 잡는 것이 아닌, 벽을 해방시키는 벽화가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은 벽의 해방을 넘어서 벽화를 해방시켜야 할 때인지도 모른다.
최범 디자인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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