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혈, 최소수혈.. 고대안암병원의 실험과 고집

이슬비 헬스조선 기자 2021. 6. 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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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부족 시대④] '환자혈액관리' 선도.. 박종훈 병원장 "환자 안전 위해 불가피"
자가 수혈기 ‘셀세이버’로 수술 중 환자의 피를 모으고 있다./사진=고려대안암병원

수술실 하면 피가 낭자한 모습을 떠올린다. 고려대 안암병원 수술실은 다르다. 환자의 피라면 한 방울이라도 놓치지 않고 모은다. 그렇게 모은 환자 본인의 피를, 수혈이 필요할 때 활용한다. 이는 환자 혈액을 최대한 아껴 일반적인 수혈의 부작용과 공급 부족을 동시에 해결하자는 취지로 도입된 ‘환자혈액관리(PBM)’의 실천이다. PBM 개념은 이미 10년 전 출현했고, 우리 정부도 3년 전 PBM 도입을 위해 ‘제1차 혈액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아직 병원가에 나타난 변화는 미미하고, PBM 자체를 모르는 의사도 적지 않다.

이 같은 변화의 선두에 고려대 안암병원이 있다. 고대 안암병원은 2018년 아시아 최초 최소수혈외과병원 실현 계획을 선언했다. 국내 PBM 도입에 힘써 온 고대 안암병원 박종훈 병원장(정형외과)을 만났다.

◇수혈 적정률 30%대에서 80%대로↑

고대 안암병원은 2018년 10월 무수혈 센터를 개소하며 PBM 도입 시작을 알렸다. 무수혈 센터에서는 원하는 환자에 한해 아예 수혈하지 않고 치료한다. 이 센터를 통해 다양한 파트가 협력해 환자의 혈액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법을 익혔다. 일반 모든 환자를 대상으로도 최소수혈을 할 수 있도록 탄탄한 기반을 다진 셈이다. 또한, 꼭 필요할 때만 수혈할 수 있도록 혈액 속 헤모글로빈 수치 기준을 국내에서 가장 엄격한 기준인 7g/㎗로 적용했다. 우리나라에선 헤모글로빈 수치가 10g/㎗ 미만이면서 이전보다 수치가 10% 이상 감소했다는 기준에만 맞으면 수혈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신입 의료진에 대한 철저한 교육, 수혈 이후 케이스를 되돌아보는 내부시스템 구축, 적극적인 제도 마련, 병원 차원 적정 수혈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책자 발간 등 최소수혈외과병원의 기반을 다져왔다.

변화는 컸다. 2018년 고려대 안암병원 전체 외래와 입원환자 적혈구 수혈 적정률은 37.5%였다. 무수혈센터 개소 이후 수혈 평균 적정률은 2019년 62%, 2020년 80.2%로 크게 올라갔다. 특히 수혈을 많이 하는 수술이라고 알려진 무릎인공관절 치환술에서의 수혈률 차이는 더 뚜렷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국내 무릎인공관절 치환술에서 수혈률은 78%에 이른다. 하지만 고대 안암병원의 수혈률은 2019년 3.8%에 불과했다. 무려 20배 이상 차이 난다.

고려대 안암병원 한승범 교수가 무수혈 수술을 집도하고 있다./사진=고려대안암병원

◇PBM 실천에 가장 중요한 점, 인식 변화

결국 변화를 만드는 건 인식과 의지의 문제다. 박종훈 병원장은 “제일 어려웠던 건 아무래도 의사들을 설득하는 것이었다”며 “수술 중 출혈을 줄이려면 의사가 신경 써야 하는 점이 매우 많아지는데, 그 노력을 꼭 해야 할 만큼 수혈을 줄이는 게 얼마나 환자에게 좋은지 인식하고 있는 의사 자체가 잘 없었다”고 말했다.

출혈을 줄이기 위해서는 의료진의 다양한 노력이 필요하다. 노력은 수술 전부터 시작된다. 빈혈 등이 없어야 수혈량이 줄기에, 환자 개개인에게 맞는 고용량 철분제, 조혈촉진제 등을 처방한다. 수술 중에는 정밀한 수술로 출혈을 줄여야 한다. 또 수술 중 나오는 피를 모아 다시 환자에게 투여하는 자가 수혈을 하려면 마취과 등 다른 과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 수술 후에도 수술 부위에서 발생하는 출혈을 줄이기 위해 수술 부위 안에 국소지혈제를 삽입했다가 일정 시간 이후 제거해야 한다. 박종훈 병원장은 “처음 PBM을 도입한 수술을 해보면 상당히 신경 쓰이고, 혹여 잘못될까 불안하다”며 “노하우를 익히는 데까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PBM도입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심지어 효능감은 떨어지는 노력이다. 수혈의 효과는 눈에 뚜렷이 보인다.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지 않는가. 긴급한 상황 속 수혈을 하면 환자의 상태가 빠르게 안정된다. 하지만, 최대한 환자의 피를 아껴가며 수술했을 때의 장점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례를 오랜 시간 모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혈을 줄이도록 노력하는 게 환자의 사망률도 낮추고, 합병증 발생률도 낮춘다는 명확한 연구들이 나왔지만, 이미 수혈은 만연해졌다. 박종훈 병원장은 “환자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수혈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하는 문제지만, 이를 잘 알고 있는 의사는 생각보다 없었다”며 “위험성을 알려 인식을 바꾸자, 그제야 변화가 나타났다”고 말했다. 이어 “한 예로 정형외과 구성원에게 PBM을 설득하고, 모든 처방이 적절했는지 피드백을 주고받자 수혈 사용률이 60%나 줄었다”고 말했다. 가이드라인을 사전에 확인하도록 하는 것만으로도 환자에게 불필요한 수혈을 효과적으로 줄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대 안암병원은 2013년 선도적으로 정형외과에서 수술 전 수혈가이드라인을 확인해 불필요한 수혈을 하지 않도록 했다. 그 결과, 2012년 환자 1만명당 수혈량은 157.5유닛이었는데, 지난 2018년에는 76.4유닛으로 절반이나 줄었다.

고려대 안암병원 박종훈 병원장/사진=고려대안암병원

◇실천도 결국 의지 문제

PBM 도입을 위해 사용되는 약제와 기구는 대부분 비급여다. 병원 자체에서 PBM을 도입하겠다고 해서 실제로 실천해내기 어려운 이유다. 박종훈 병원장은 “물론 비급여이기 때문에 실천하기가 아무래도 어렵지만, 결국 의지 문제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수혈이 필요할 환자와 보호자에게 수혈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부작용과 PBM의 효과 등의 정보를 상세히 설명한 뒤 사용되는 약제가 비급여라는 걸 알렸다”며 “환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이기 때문에 설명하면 모든 환자가 비급여지만 PBM을 위한 약제, 기구 등의 사용을 원했다”고 말했다.

◇정부 중심 관리, 감독 필요해

박종훈 병원장은 “PBM은 결과조차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로 모든 의사가 자발적으로 잘 지키기는 힘들다”며 “더 큰 변화를 위해선 정부의 관리, 감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PBM이 잘 운영되고 있는 호주와 뉴질랜드는 주 정부 차원에서 관리되고 있다.

우리나라 정부가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 건 아니다. 지난 2018년 ‘제1차 혈액관리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혈액관리를 위한 수혈 가이드라인도 제시했다. 문제는 이 가이드라인을 맞게 쓰고 있는지 모니터링을 한 번도 안 했다는데 있다. 적절성 평가를 할 예정이라고 발표했지만 실제로 실천되지는 않고 있다. 당연히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못했을 때 주어지는 패널티도 집행된 적이 없다. 박종훈 병원장은 “강한 관리 감독으로 의사들이 PBM을 인식할 수밖에 없게 했을 때 또 다음 변화가 계속될 것이라 생각한다”며 “우리나라도 아직 늦은 게 아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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