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최민식 손 잡은 감독, 두 번이나 새로 쓴 흥행 신기록
[양형석 기자]
9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보고 왔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에게 "한국 영화를 왜 돈 아깝게 극장에서 봐?"라며 핀잔을 듣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 영화는 화려한 볼거리를 내세우는 할리우드 영화나 다작으로 노하우가 쌓여 있던 홍콩영화에 비해 제작 규모나 기술, 아이디어 등에서 수준을 따라가지 못했다. 당연히 완성도에서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었고 극장 점유율도 그만큼 떨어졌다.
하지만 이제 한국영화의 위상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다. 실제로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기준으로 2005년부터 작년까지 대한민국 극장가에는 총 25편의 천만영화가 탄생했는데 이 중 한국영화가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17편(68%)에 달한다. 게다가 역대 흥행 1위 <명량>부터 4위 <국제시장>까지 상위 4편은 모두 한국영화가 독차지하고 있다. 이제 한국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2년 연속 수상자를 배출할 정도로 수준이 높아졌다.
▲ <쉬리>는 서울에서만 240만 관객을 돌파하며 <타이타닉>의 기록을 2년 만에 훌쩍 뛰어 넘었다. |
ⓒ 강제규 필름 |
두 번이나 신기록을 새로 쓴 흥행 마술사
중앙대 연극영화과 출신의 강제규 감독은 1990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의 속편인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의 각본을 쓰면서 충무로에 등장했다.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백상예술대상 시나리오상을 수상한 강 감독은 한국형 누아르 <게임의 법칙> 각본까지 쓰며 시나리오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강제규 감독은 작가에만 만족하지 않고 1996년 <은행나무 침대>를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국내에선 흔치 않았던 'SF 판타지 멜로'를 표방했던 <은행나무 침대>는 한석규, 심혜진, 신현준 등 배우들의 호연과 강제규 감독의 세련된 연출로 서울에서만 45만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다. 강제규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기획에도 참여한 <지상만가>가 흥행 참패하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곧바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강제규 감독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한국 극장가 흥행 신기록을 새로 쓴 <쉬리>였다.
<넘버3>의 3인방 한석규와 최민식, 송강호에 재미교포 출신의 신예 김윤진이 합류한 <쉬리>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로 신드롬에 가까운 인기를 얻었고 전국 580만 관객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는 역대 한국 영화 신기록을 가지고 있던 <서편제>(서울 100만)는 물론이고 세계 박스오피스를 지배했던 <타이타닉>(서울 190만)을 능가하는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당시 멀티플렉스가 흔치 않았던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성적이다.
<쉬리>의 대성공으로 충무로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 떠오른 강제규 감독은 2000년대 들어 <단적비연수>, <베사메무쵸>, <블루> 등의 제작에 참여했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결국 강제규 감독은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3번째 작품 <태극기 휘날리며>를 연출했다.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 <실미도> 개봉 두 달 후에 극장에 걸린 <태극기 휘날리며>는 <'실미도>를 추월하며 역대 최고 흥행 기록(1170만)을 다시 썼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한동안 제작에 전념하던 강제규 감독은 2011년 신작 <마이웨이>가 전국 210만 관객에 그치며 큰 아쉬움을 남겼다(<마이웨이>의 제작비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2배가 넘는 300억 원 수준이었다). <마이웨이> 실패 후 대작에 미련을 버린 강제규 감독은 2014년 37억 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장수상회>를 연출했다. 한 때 최고의 흥행 보증수표였던 강제규 감독은 현재 하정우, 임시완 주연의 <보스턴1947>을 준비하고 있다.
▲ 북한 특수8군단 공작원 박무영을 연기한 최민식의 카리스마는 주인공 한석규를 능가할 정도였다. |
ⓒ 강제규 필름 |
방송가에서는 '한국 예능은 <무한도전>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무한도전>을 계기로 방송가에 정해진 틀을 깬 다양하고 자유로운 포맷의 예능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뜻이다. 비슷한 이유로 영화계에서는 '한국 영화는 <쉬리> 전과 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한국영화는 <쉬리>의 성공 이후 많은 제작비가 투입된 상업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극장가에서 한국 영화가 차지하는 비중도 급격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흔히 <쉬리>를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시초'라고 부른다. 실제로 <쉬리>는 기존의 한국 영화에서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물량공세로 관객들의 눈을 사로 잡았다. 특히 박무영(최민식 분)이 이끄는 북한 특수 8군단이 탈취한 CTX를 이용해 잠실의 백화점을 폭파시키는 장면이나 터널에서의 수류탄 폭파 장면,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OP요원과 특수8군단의 총격전 등은 당시 한국 영화 제작 환경에서는 좀처럼 연출하기 힘든 장면이었다.
사실 <쉬리>가 관객들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결정적인 이유는 할리우드 B급 오락영화 수준의 CG나 특수효과 때문이 아닌 애절한 멜로를 기반으로 한 탄탄한 스토리 때문이다. 요원으로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쏴야 했던 유중원(한석규 분)과 감시를 위해 접근한 남측의 요원을 사랑하게 된 이방희(김윤진 분)의 마음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이방희의 마지막 음성 메시지는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기 충분했다.
하지만 역시 특수8군단을 이끌던 박무영을 연기한 최민식의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빼놓고는 <쉬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특히 박무영이 변전실에서 유중원에게 북한의 암울한 현실을 토로하며 울분을 터트리는 장면은 최민식의 엄청난 열연과 만나 영화의 긴장감을 극대화했다. 그 어떤 CG나 특수효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명장면이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물론 <쉬리> 개봉 후 한석규가 연기한 유중원 캐릭터는 최민식이 연기한 박무영의 카리스마에 다소 가려진 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쉬리>에서 한석규가 차지한 비중은 다른 배우들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컸다. 한석규의 캐스팅 소식이 알려지자 대기업에서 곧바로 투자 유치를 결정했을 정도. 당시 이름값에 못 미치는 2억5000만원의 출연료를 받고 <쉬리>에 출연한 한석규는 <쉬리>가 대박이 터지면서 엄청난 금액의 런닝 게런티를 수령했다.
▲ <쉬리> 개봉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김윤진(왼쪽)은 대배우들 사이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연기를 선보였다. |
ⓒ 강제규 필름 |
<쉬리>는 액체폭탄 CTX를 두고 벌이는 남한 특수요원과 북한 특수 8군단의 대립을 그린 영화다. 당연히 스토리는 남자 캐릭터 중심이 될 수밖에 없고 상대적으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크지 않아 이방희 캐스팅에 난항을 겪었다. 그러던 중 드라마 <웨딩드레스>를 본 강제규 감독이 신선한 느낌의 신인 여성 배우 김윤진을 발견하고 그녀를 이방희 역에 캐스팅했다. 결과적으로 김윤진 캐스팅은 제작사에게나 배우에게나 '윈윈'이 됐다.
김윤진은 오랜 외국 생활로 표준어 발음이 다소 어색했고 연기 경험도 많지 않았지만 이는 오히려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김윤진은 사랑하는 사람과 죽여야 할 대상 사이에서 흔들리는 이방희의 복잡한 감정 연기를 풍부하게 표현했다. 김윤진은 <쉬리> 이후 <단적비연수>, <아이언팜>, <예스터데이> 등이 연속으로 흥행실패하며 <쉬리>의 이미지에 갇히는 듯 했지만 2004년 미드 <로스트>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했다.
<로스트>의 성공 이후 김윤진은 국내에서 <세븐 데이즈>, <하모니>, <이웃사람> 등을 흥행시키며 배우로서 입지를 굳혔다. 김윤진은 2014년 1400만 관객을 동원한 <국제시장>에서 첫사랑부터 아줌마, 할머니 연기까지 섭렵하는 넓은 연기폭을 보여주기도 했다. 2013년 미드 시리즈 <미스트리스>에 캐스팅된 김윤진은 시즌4까지 제작된 <미스트리스>에 모두 출연했고 현재 소지섭, 나나와 함께 영화 <자백>을 차기작으로 준비하고 있다.
20년도 더 된 영화이다 보니 <쉬리>에는 당시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 중 반가운 얼굴들도 꽤 많이 찾을 수 있다. 북한 특수 8군단 소속으로 서울시내 시가전에서 목숨을 잃는 안현철 역은 김수로가 맡았고 영화 막판 유중원을 심문하는 특별 조사관 중에는 황정민과 장현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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