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법 위에 계급', 청산돼야 할 폐습

박정태 2021. 6. 15. 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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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女 부사관 성추행 사건
폐쇄적 구조·상명하복 조직서
제도와 매뉴얼 아무 소용 없어

지휘관에 군검찰 종속된 영향
군 인식 개선과 함께 지휘권과
사법권 분리하는 개혁 절실해

군사법원 폐지 또는 일반범죄
민간 이관 검토할 만…앞으로
정의와 인권 위한 법치 작동돼
국가폭력 희생자 없도록 해야

군대 내에서 세상이 경악할 만한 가혹 행위나 성범죄 등 중대 사건이 터질 때마다 대책은 어김없이 쏟아져 나온다. 군 인권·병영문화 개선 기구가 설치되고 전담 태스크포스(TF)가 가동된다. 제도가 정비되고 각종 매뉴얼이 마련된다. 하지만 딱 그때뿐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매뉴얼을 만들어 놓아도 소용이 없다. 시스템이 전혀 작동하지 않는다. 특유의 폐쇄적 구조와 상명하복의 조직 문화 탓이다. 중대 범죄가 다시 재연되면 그제야 부랴부랴 재발 방지책 강구에 나서는 악순환이 되풀이된다.

최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린 공군 여성 부사관 성추행 사건도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성추행을 신고했으나 피해자 보호는커녕 적절한 조치도 없었다. 조직적 사건 은폐, 상관의 회유·압박 등 2차 가해, 부실한 초동 수사, 누락 및 늑장 보고 등 총체적 난맥상이 드러났다. 진상을 규명해야 할 해당 부대 군사경찰과 군검찰은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 국선변호인(군법무관)은 유명무실했다. 피해자 지원을 위한 업무 매뉴얼도 있으나 마나였다. 부대 지휘관이 진급 평정에 악영향을 미치는 사건 노출을 우려하고, 군 수사기관은 인사권을 가진 지휘관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 하에서 나타나는 부조리다.

2014년 사회적 충격을 준 ‘윤 일병 사망 사건’ 때도 그랬다. 당초 육군 28사단 부대에서 벌어진 우발적 폭행에 의한 질식사로 발표됐다. 군 수사기관이 사실을 철저히 축소·은폐한 결과였다. 가해자들에겐 상해치사 혐의가 적용됐다. 하지만 사건의 전말은 수개월 뒤 군인권센터의 폭로로 드러났다. 선임병들의 지속적인 집단 구타와 가혹 행위로 끔찍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국민적 공분이 커지자 가해자들의 죄목은 살인죄로 변경됐다. 당시 군검찰의 독립성 확보를 위한 군 사법제도 개편 여론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불붙었다. 하지만 국방부와 군의 반발로 보통군사법원을 기존 사단급에서 군단급 이상에 설치하기로 하는 등의 초라한 법 개정에 그쳤다.

미완으로 끝난 군 사법개혁 문제가 이번 공군 부사관 사건을 계기로 재점화됐다. 성범죄 예방을 위한 군 인식 개선 등과는 별개로 그런 범죄를 은폐하고 부실 수사를 하는 음습한 환경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과거보다 더 커졌다. 지금 국회에는 지난해 정부가 발의한 군사법원법 개정안이 계류돼 있다. 사법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1심 군사법원을 국방부 장관 소속으로 설치하고 고등군사법원을 폐지해 항소심을 서울고등법원으로 이관하며, 관할관 및 심판관 제도를 폐지하는 게 골자다. 또 장성급 지휘 부대 소속 검찰부를 폐지하는 대신 국방부 장관 및 각 군 참모총장 산하 검찰단을 설치하는 내용 등이 담겼다.

군 지휘권과 사법권의 분리가 절실하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가야 할 방향이다. 특히 관할관·심판관은 진즉 없어졌어야 할 제도다. 이는 지휘관이 관할관(1심은 통상 군단장)이란 권한으로 재판관을 지정하고 일반 장교를 심판관이란 이름으로 판사석에 앉힐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사실상 지휘관이 재판에 개입할 통로로 작동됨으로써 군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을 가중시킨 근본 원인이다. 관할관 제도가 폐지되면 지휘관의 형량 감경권(확인조치권)도 자동으로 없어진다.

하지만 이 정도 개정안으로 충분할까. 전시가 아닌 평시에 군사법원이 존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제기되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평시 군사법원을 유지하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 중국과 대치하고 있는 대만도 이미 오래전 군사법원을 폐지했다. 정녕 국내 안보 상황 등으로 인해 군사법원이 필요하다면 기밀 유지를 요하는 군사범죄가 아닌 성범죄·폭력범죄 등 일반 범죄는 민간 사법체계에서 담당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도 방법이다.

시대의 변화를 읽어가야 할 국회의 책무가 막중하다. 과거를 답습한 찬반 논란의 늪에서 허우적대지 말고 과감한 개혁의 길을 가야 하겠다. 군검찰·법원이 지휘관에게 종속돼 법 위에 계급이 군림하는 시대는 청산돼야 한다. 군에서도 법치를 통해 정의가 살아나고 인권이 숨 쉬도록 해야 할 터이다. 지난주 종영한 한 드라마의 “정의롭지 않은 법은 가장 잔인한 폭력이다”라는 엔딩 멘트가 떠오른다. 군 개혁이 이번에도 좌절된다면 군에서 철저하게 버려진 그 여성 부사관은 가장 잔인한 국가폭력을 당한 희생자로 기록될 것이다.

박정태 논설위원 jt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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