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근의 세금이야기] "나의 평생직업 세금쟁이.. 진정 하늘이 내려준 천직"

2021. 6. 15.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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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


흔히들 직업을 하늘이 내려 주었다고 해서 천직(天職)이라고도 부른다. 필자 역시 전적으로 동감이다. 왜냐하면 하늘이 필자에게는 ‘평생 세금쟁이’라는 직업을 내려 주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았기 때문이다. 한 번 소개해 볼까 한다.

필자는 1946년 6월 25일 태어났는데 희한하게도 만 20세가 다 돼가는 1966년 6월 20일에 국세청 9급 공무원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40년 가까운 세월(정확하게는 재직 중 입대로 휴직한 3년을 감안하면 35년6개월) 동안 국세본청을 비롯해 지방국세청과 일선 세무서를 두루 거쳤다.

여기에다 2004년 말 대전지방국세청장 직책에서 명예퇴임한 후 당시 1만여명(현재 1만3000여명) 회원들의 직접 선거로 뽑힌 한국세무사회장직을 4년 동안 수행했다. 또한 필자가 직접 설립해 지금껏 운영해오고 있는 세무법인 대표자로서 오로지 세금 일에만 종사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한평생을 천직인 세금쟁이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돌이켜보면 세상 물정 모르던 스무 살 때 국세 공직에 입문했으니 철없던 그 시절은 그야말로 사고뭉치(?)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어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웃음이 절로 난다. 무엇보다 ‘세금’이라는 민감한 분야에 발을 디뎌 수십년을 살아오는 동안 필자의 발부리는 얼마나 많은 걸림돌에 걸렸으랴. 어찌 됐든 문자 그대로 한평생이 우여곡절과 파란만장의 연속이 아니었나 하는 감회마저 든다. 그럼에도 정말 운 좋게 그때그때 무너지지 않고 무사히 ‘명예퇴임’이라는 목적지까지 도달한 것을 보면 아마도 천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2004년 말 국세 공직자로서 옷을 벗던 날 모처럼 가족끼리 홀가분하게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만약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난다면 또다시 국세 공직자로 일하고 싶다”고 했더니 가족 모두가 세금쟁이 생활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어왔다. 그러면서 그날 오전에 있었던 명예퇴임식장에서 필자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는 분명 하늘이 내려준 평생 세금쟁이라며 인증샷을 보내 주었다.

필자는 평소 겉보기와는 달리 내면적으로는 꽤 소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 세상 사람들의 이목에 지나칠 정도로 민감한 편이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그동안 사랑하는 가족에게 너무나도 많은 심적 부담을 주었다. 왜 떳떳하고 당당하게 살지 못했던가? 왜 가족과 함께 휴가도 즐기고 맛있는 식당에 가서 함께 식사도 못 하고 늘 남들 눈치만 보고 살아야 했던가? 되돌아보니 하늘이 필자에게 한평생 세금쟁이로서 그렇게 살아가라고 하는 강한 명령이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의 필름을 1966년으로 되돌려 보고자 한다. 그해 3월 3일은 바로 국세청이 처음으로 문을 연 날이라서 국세청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반면 필자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한 채 몹시도 낙망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차가운 겨울 아침, 필자의 집으로 배달된 어떤 조간신문에 게재된 희한한 광고문 하나가 필자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司稅職 5級 乙類 公務員 採用 公告” 오늘날로 말하면 국세청 9급 공무원 채용 안내 광고였는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해 그 글귀의 뜻조차 모르던 필자가 유독 그 광고문에 초점을 맞추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시험과목 때문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일반상식 그리고 맨 끝에 ‘상업부기(商業簿記)’라는 과목이 있었다. 당시 필자는 상업부기라는 교과 과정이 없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녔는데 고교 2학년 때 우연하게도 중학교 시절 바로 옆 반 담임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그분이 가르치는 과목이 바로 상업부기였다. 그런데 필자가 진학해 보고 싶었던 대학교의 상과대학(지금의 경영대학) 입시과목 중 선택과목이 ‘독일어’와 ‘상업부기’여서 독일어는 이미 학기 초부터 선택해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선생님께서 불러 선택과목을 물어보고 대뜸 상업부기 과목을 수강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의 수업에 꼭 참석하라는 엄명(?)까지 내리셨다. 친구들도 데리고 오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몹시 고민했으나 선생님과의 개인적 친분을 생각해 몇몇 친구들과 함께 상업부기 과목을 수강하고 졸업 때까지 열심히 수학했다.

바로 그 시험과목이 지금 눈앞에 나타나 있지 않은가!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은 내가 목표로 하는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던 터라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으며, 여기에다 상업부기 과목 또한 2년 동안 나름대로 부지런히 공부해 놓은 터여서 왠지 모르게 구미가 당겨 즉시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당시 국세청으로서는 개청으로 인해 조직이 대폭 늘어나 많은 인력이 필요해 1차로 500명을 뽑게 됐는데, 그 시험에 무려 5만명의 지원자가 몰려 가히 100대 1이 넘는 살인적인 경쟁률을 보였지만 당당히 합격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전체 합격자 가운데 병역의무를 마친 자들과 군사원호대상자 자녀들에게 별도로 몇 점씩의 가산점을 준 것을 감안하면 필자의 성적은 매우 상위권이었다고 했다.

합격자 발표 얼마 후 국세청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근무하고 싶은 세무관서를 써내라는 것이었다.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일단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 인근 세무서로 지원했다. 그랬더니 그대로 이뤄져 1966년 6월 20일 드디어 대구에 있는 세무서로 발령받아 첫 출근을 하게 됐다. 그로부터 지금껏 한눈팔지 않고 반백년 이상을 오로지 세금 일에만 몰두해오고 있으니 이는 진정 하늘이 내려준 천직이 아니고 무엇이랴. 평생 세금쟁이 직업으로 말이다.

조용근 사외 논설위원·전 한국세무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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