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계 흔드는 여성 지휘자들.. 국내도 '여풍당당'
아누 탈리, 타니아 밀러, 성시연, 달리아 스타세브스카.
지난해 10월부터 이달까지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KBS교향악단,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코심) 등 국내 빅3 오케스트라의 정기공연 포디움에 섰거나 설 예정인 여성 지휘자들이다. 최근 오케스트라 지휘에 불고 있는 여풍이 한국에도 강하게 불어오고 있다.
에스토니아 출신으로 노르딕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아누 탈리는 1985년 창단된 코심에서 정기공연을 지휘한 첫 여성 지휘자로 기록됐다. 코심이 2018년 국립오페라단의 ‘라보엠’과 지난해 예술의전당 11시 콘서트를 연주했을 때 각각 성시연과 여자경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코심 기획 공연이 아니어서 지휘자 선정까지 한 것은 아니었다. KBS교향악단도 지난달 2012년 재단법인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정기공연의 지휘봉을 여성 지휘자에게 맡겼다. 캐나다를 대표하는 여성 지휘자로 빅토리아 심포니 음악감독을 오랫동안 역임한 타니아 밀러가 그 주인공이다. KBS는 특별연주회 등에서 김경희 성시연 여자경 진솔 등 국내 여성 지휘자와 무대를 꾸민 적은 있지만, 정기연주회엔 남성 지휘자만 초청했다.
서울시향은 2005년 재단법인으로 독립한 직후부터 여성 지휘자에게 포디움을 개방했다. 2005년 9월 당시 상하이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였던 이선영이 특별공연에 선 것을 시작으로 2007년 시앤 장(중국), 2008년 성시연과 조앤 팔래타(미국), 2010년 지젤 벤-도르(미국)가 정기공연에서 서울시향을 이끌었다. 특히 2009~2013년 서울시향 부지휘자를 거쳐 2014~2017년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를 역임한 성시연은 서울시향의 단골 여성 지휘자로서 지난 1월에도 포디움에 섰다.
다만 성시연을 제외한 여성 지휘자는 오는 17~18일 서울시향과 호흡을 맞추는 핀란드 출신 달리아 스타세브스카가 2010년 벤-도르 이후 11년 만이다. BBC 심포니 수석 객원 지휘자이자 올해 가을부터 라티 심포니 오케스트라 상임 지휘자로 활동을 시작하는 스타세브스카는 브리튼의 ‘진혼 교향곡’, 라흐마니노프의 ‘교향적 무곡’, 바이올리니스트 김다미 협연으로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을 들려줄 예정이다.
최근 전 세계 음악계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여성 지휘자들이 잇따라 유리 천정을 깨는 것이다. 세계 음악의 중심지이면서도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에서 마린 알솝이 2019년 여성 지휘자로는 처음으로 빈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것, 지난해 100주년을 맞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요아나 말비츠가 여성 지휘자로선 처음으로 오페라를 지휘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세계 최초의 여성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안토니아 브리코(1902~1989)를 다룬 영화 ‘더 컨덕터’(2018년)에서도 그려진 것처럼 여성 지휘자들은 오랫동안 “여자가 어떻게 지휘를 하느냐”는 편견 및 성차별과 싸워야 했다. 오케스트라가 여성 단원을 받아들인 것 자체가 길지 않은 상황에서 여성 지휘자가 포디움에 오르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여성 단원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첫 입단은 1982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첫 입단은 1997년이었다. 20세기 중반 뉴욕타임스의 저명한 클래식 평론가 해럴드 숀버그(1915~2003)가 저서 ‘위대한 지휘자들’(1967)에서 “여성 지휘자가 무대에 서면 언제 업비트(지휘봉을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가 시작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그때 속치마가 보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라고 쓴 것은 지휘를 남성의 전유물로 보는 통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포디움에 오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온 선배 여성 지휘자들 덕분에 1990년대부터 여성 지휘자들은 본격적으로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상임 또는 수석 지휘자를 맡게 됐다.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 지휘자 가운데 여성은 5% 정도에 불과하지만 전 세계에서 지휘자를 목표로 하는 여성들의 수가 예전보다 훨씬 늘어난 만큼 활약도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2017~2018년 전 세계를 강타한 미투 운동은 보수적인 클래식계를 흔들며 여성 지휘자들이 부각하는 계기가 됐다. 제임스 러바인, 샤를 뒤투아, 다니엘레 가티 등 거장 지휘자들이 성추행 등 성범죄로 몰락하자 클래식계는 보수성을 탈피하기 위해 나이 성별 인종 등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박선희 코심 대표는 “클래식계가 최근 젠더 문제에 의식적으로 신경 쓰면서 여성 지휘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하지만 이 때문에 쿼터제를 적용해 여성 지휘자에게 포디움을 내주는 것은 아니다. 실력 있는 여성 지휘자들이 뒤늦게 기회를 얻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9월 프랑스 필하모니 드 파리가 사상 최초 여성 지휘자만을 대상으로 한 콩쿠르 ‘라 마에스트라’(La Maestra)를 개최한 것은 다양성 확보를 위한 클래식계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콩쿠르에는 51개국에서 220명의 여성 지휘자가 지원했다. 여성에게 특혜를 주는 역차별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일각에서 나왔지만, 여성 지휘자가 능력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는 목소리가 압도적이었다.
음악 칼럼니스트인 노승림 숙명여대 교수는 “여성 지휘자의 약진은 과거보다 음악교육 등으로 여성의 진출이 많아진 데다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클래식계에도 성평등 의식이 확산된 덕분”이라며 “하지만 아직도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맡은 여성의 비율은 절대적으로 낮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의 경우 미투 운동과 상관없이 여성 지휘자의 입지가 구축됐다. 서울시향 부지휘자와 경기필 상임지휘자를 지난 성시연을 시작으로 TV 예능 ‘놀면 뭐하니’에 출연했던 강남심포니 상임지휘자 여자경이 여성 지휘자를 대중적으로 많이 알렸다. 게임음악 콘서트로 알려진 진솔도 빼놓을 수 없다”면서 “해외에선 노르웨이 트론헤임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인 장한나와 오는 8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음악감독으로 취임하는 김은선의 활약도 돋보인다”고 덧붙였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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