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버려라" 할 줄 알았는데.. 미니멀리즘 전도사의 반전
[이인미 기자]
지난 4월 초, 나는 그때까지 수년간 소장해 온 책들 중 2/3를 폐기했다. 가히 칠팔백 권을 버린 것 같다. 폐기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삿짐을 줄이자 였고, 다른 하나는 이참에 미니멀리즘을 실천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지난 주말 "그 책이 내게 있었지" 하면서 책꽂이를 살펴보는데, 어느새 규모가 작아진 나의 책꽂이에 그 책은 없었다. 나름 엄격한 기준을 두어 차근차근 구분해서 버렸건만(혹은 헐값에 중고매장으로 보냄), 불과 두 달 만에 콕 집어 그 책이 다시 필요하게 될 줄이야. 나는 "아! 괜히 버렸어"라고 중얼거리며 장장 24시간 동안 집중적으로 후회를 했다. 동시에 애먼 미니멀리즘까지 원망을 했다. 하필이면 4월 초 그때 내가 미니멀리즘에 꽂힐 게 뭐람.
언제부턴가 넷플릭스에 접속할 때면 다큐멘터리 <미니멀리즘: 오늘도 버리는 사람들>이 추천목록에 뜨곤 했다. 하지만 나는 <미니멀리즘>을 굳이 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니멀리즘에 대해 내가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버려라, 비워라, 그거 아니겠어?" 하는 마음이었다. 심지어 지난 4월 초 책을 정리할 즈음엔 내심 '난 미니멀리스트로 거듭나고 있어'라고 자부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하필이면 미니멀리즘 차원에서 버린 책에 대해 엄청 후회를 곱씹으며 '참고문헌으로 필요하니 내일 대학(모교) 도서관에 가자'라고 작정한 바로 그 날, 나는 이 다큐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버린 책이 못내 아쉬웠던 터라 솔직히 미니멀리즘 비판(!)이 영화관람의 목표였다. '못 버리는 것에 대해 뭐라고 지적하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이었다.
그런데 상영시간에서도 미니멀리즘을 실천했는가 싶게 <미니멀리즘>이 정말 순식간에 끝나버린 뒤(53분), 나는 한동안 다소 멍한 상태로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미니멀리즘>이 '버림이나 비움'이라기보다는 '존재(being)와 정신(mind)'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미니멀리즘>은 물건이 아니라 인간,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정신에 대한 이야기로 구성돼있다. 추억의 물건들을 모아서 상자에 보관하지만 정작 추억은 '상자 안'이 아니라 '마음 안'에 있다는 것, 어떤 희귀한 물건을 소장해서 흐뭇한 줄 알지만 정작 흐뭇함과 뿌듯함은 나 자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건 없지?" 하며 결핍을 꼬집는 광고방송보다 소장품에 대한 나의 자율적 평가를 우선할 것 등 <미니멀리즘>은 상영시간 내내, 물질이 아니라 정신에 집중할 것을 정중히 부탁한다.
▲ 스크린샷 물건중독에 관하여 생각하기 |
ⓒ 넷플릭스 |
<미니멀리즘>이 강조하는 것은 소유와 애착&집착에 대한 경계, 다시 말해 '물건중독(stuffitis)'에 대한 경계다. <미니멀리즘>은 이 물건중독을 알코올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과 거의 같은 급으로 다룬다.
▲ 스크린샷 물건중독에 대하여 생각하기 |
ⓒ 넷플릭스 |
우리가 몸붙여 살고 있는 자본주의는 우리의 물건중독을 치료해줄 의도도 동기도 없다. 오히려 물건중독을 부추긴다. 우리에게 물건중독이 유지되어야만 물건을 사고 파는 가운데 유지되는 자본주의체제가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으며, 경제성장도 무리없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각종 광고물들은 "이걸 가져, 이게 없어서 불행한 거야, 이걸 가지면 행복해질 거야, 이미 갖고 있어? 그러면 더 가져!"라고 홍보한다.
▲ 스크린샷 광고가 물건중독을 부추긴다는 설명 |
ⓒ 넷플릭스 |
만일 의식주에 직접 관련된 필수적 항목이 결핍되어 있다면 그 결핍은 채워야 하고 채우는 게 바람직하다. 밥솥이 없는 사람에게 밥솥 없는 결핍감을 느끼지 말라고 조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화장실 둘 있는 집에 4인 가족이 살면서 화장실 숫자에 대해 결핍을 느끼는 건 위장된 결핍이다. 더 큰 집에 사는 가족과 비교하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결핍감이다.
그리고, 축구를 하지 않으면서 한정판 축구화를 사서 모은다든지, 식구들마다 침실을 하나씩 차지한 뒤에 왜 방이 추가로 하나 남지 않는지(옷방이 따로 없다!)에 대해 결핍감을 느낀다면 그 또한 실질적 결핍이라 하기 어렵다. <미니멀리즘>은 물건중독의 기저에 바로 그 같은 '비교하기'와 '남 따라하기'가 깔려있음을 지적한다.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따져보자. 나의 결핍감은 순전한 결핍감인가. 혹 위장된 결핍감, 물건중독이 자아낸 결핍감은 아닌가.
<미니멀리즘>의 내레이션은 초등학교 동창이자 미니멀리스트인 조슈아(Joshua Fields Millburn)와 라이언(Ryan Nicodemus)이 번갈아 맡았는데, 이들도 과거엔 대단한 물건중독자였다. 물건을 사들이고 또 사들이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철석같이 믿었던 사람들이었다. 물건을 사들일 만큼 경제력을 갖춰야 했기에 그들은 돈을 열심히 벌었다. 열심히 일하면 많이 벌 수 있었기에 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열심히 일했다. 고속승진도 해봤고, 고가연봉도 받아봤다. 고급 주택에 고급 가구를 들여놓고 살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은 웬일인지 계속 공허했다.
▲ 영화 포스터 <미니멀리스트: 오늘도 비우는 사람들> |
ⓒ 넷플릭스 |
라이언은 단순한 삶, 즉 미니멀리즘의 삶은 절대 쉬운 삶이 아니며 그것을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따라서 내가 한 번쯤 큰 결심을 한 후 물건들을 싹 정리해서 내다버렸다고 해서 미니멀리즘을 실천했다고 자랑하면 안 될 것 같다. 지난 4월 초 이삿짐을 줄이는 반짝효과를 보았고, 대량폐기 직후 후련함을 느끼긴 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존재 대 소유'의 항목에서 존재 쪽으로 충분히 이동했는지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 게 사실이다.
영화 관람 이튿날 내가 졸업한 학교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다시 읽고 메모할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책을 괜히 버렸다고 불평할 게 아니었다. 그것 때문에 불행한 기분에 휩싸일 일도 전연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도서관을 찾아 책을 읽으면 되는 일이었다. 도서관에 한 번 더 오는 게 어째서 그렇게 불평거리였던가!
그제서야 나는 도서관이 선사하는 행복, 내게 없는 책을 보기 위해 도서관에 들어왔다가 다른 책들을 추가로 더 읽는 행동이 부여하는 행복을 감지할 수 있었다. 물건을 많이 내다버린 뒤에야 '그것'의 정체와 위치와 소중함이 확실해졌던 것이다. '그것'이란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것'은 행복을 인식할 주체('나'라는 '존재-자아')였다.
그날 해 질 무렵 도서관을 나오며, 이젠 내게 행복이 다가오면 빠짐없이 인식할 수 있겠다는 갸륵한 기분마저 들었다. 느낄 주체가 있으니 행복이든 만족이든 맘껏 느껴주겠노라는 호연지기가 생겼다. 그득했던 물건들과 그 물건들에 대한 애착(집착)이 나가버린 빈 마음 공간에서 나의 자아-행복의 인식주체가 여유있게 숨쉬고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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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뒷이야기: 그 책을 버린 것, 하나도 후회스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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