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금융당국의 '규제 본능'..혁신 외쳐도 규제 더 늘었다(종합)

송승섭 2021. 6. 9.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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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규제 838건..폐지 규제 0건, 총량 49건 늘어
감사원 "금융규제 개혁 수차례, 성과 달성 불충분"
올해에만 금융위 8개·금감원 10개 행정지도 예고

[아시아경제 송승섭 기자]정부가 금융혁신을 위해 낡은 칸막이 규제를 과감히 걷어내겠다고 공언했지만 지난 2년 동안 오히려 규제의 ‘총량’이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규제를 찔끔 손질하면서 새로운 규제를 대폭 늘려 혁신여력을 떨어뜨렸다는 비판이 나온다.

9일 윤두현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5월까지 유지되고 있는 ‘명시적 금융규제’는 838건으로 2년 전(789건)보다 많아졌다. 2019년 5월 금융위의 ‘금융규제혁신 통합 추진회의’를 통해 올라온 개선 대상은 총 132건. 이 가운데 폐지된 규제는 한 건도 없었고 대부분 정비·완화되는 데 그쳤다.

금융회사에 대한 규제는 크게 법령으로 정하는 명시적 금융규제와 비명시적 금융규제(행정지도·자율규제 등)로 나뉜다. 행정지도는 금융당국이 금융사에 지도·권고·조언하는 행정행위를, 자율규제는 금융협회가 회원사 합의로 운영하는 자체 규제를 의미한다. 금융사들은 비명시적 금융규제도 사실상 법률규제처럼 따르고 있다.

금융위는 2년 전 회의 때 규제의 존치 필요성을 입증하지 못하면 폐지·개선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존치하더라도 유연하게 분류하고 정의하는 ‘포괄적 네거티브’ 방식으로 바꾼다는 입장이었다. 당시 회의를 주재한 김용범 부위원장은 "창업과 혁신적인 시도를 막는 낡은 칸막이와 포지티브 규제체계 등을 과감히 걷어내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법제화 늦어지며 행정지도 늘어…"전향적 규제혁신 필요"

금융행정지도 개요. 사진=금융감독원

행정지도도 같은 기간 39건에서 40건으로 많아졌다. 행정지도는 권고임에도 대부분의 금융사가 불분명한 ‘그림자 규제’로 여겨 당국은 상당수 폐지한다는 방침이었다. 이에 8건을 폐지하고 22건은 법제화 후 폐지하기로 했다. 법제화가 늦어지고 새로운 규제가 늘어나면서 규제 총량이 더 커진 것이다.

새로운 행정지도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올해에만 금융위가 8개, 금융감독원이 10개의 행정지도를 예고했다. 이중 연장조치를 제외한, 기존에 없던 새로운 행정지도가 각 3개, 2개씩이다. 행정지도는 원칙적으로 최소한에 그쳐야 하고 따르지 않았다고 해서 불이익한 조치를 내려선 안 된다. 금융권 관계자들은 "금융당국이 권고하고 하지 말라는 걸 어떤 금융사가 안 따르겠느냐"면서 "사실상 규제나 마찬가지"라고 토로했다.

금융당국은 당연한 현상이라는 입장이다. 금융위 관계자는 "조항을 완전히 없애기는 어렵고 폐지가 아니더라도 개선된 규제가 많다"면서 "시간이 지나면서 규제 숫자가 늘어나는 건 자연스럽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개선 내용을 뜯어보면 규제 완화가 아닌 ‘법제화’나 ‘명확화’ 조치도 상당수였다. 자율규제의 경우 282건 중 해당없음(171건)을 제외한 111건 가운데 폐지가 14건, 개선이 97건이었다. 개선으로 집계된 내용 중 일부는 ‘기준 구체화’나 ‘산정방식 법규화’ 등으로 규제 완화와 거리가 멀다는 지적이다.

규제개혁이 당초 발표와 달리 적극적으로 이행되지 않는 모습은 과거에도 있었다. 정부와 금융당국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꾸준히 금융규제 개혁을 주요 정책과제로 설정해왔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진행된 ‘1·2단계 금융규제 정비’ 당시에는 금융규제 50%를 폐지하겠다는 목표로 정책을 추진했다. 2005년 ‘제로베이스 금융규제개혁방안’이나 2008년 ‘금융규제개혁 추진방안’이 나왔을 때도 ▲등록규제 정비 ▲민간 주도의 규제개혁 ▲업권별 영업 규제 선진화·합리화를 약속했다. 2014년에는 금융위가 직접 ‘금융규제개혁 추진방향’을 통해 명시적 규제를 원점에서 재검토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금융당국의 목표와 달리 규제혁신 효과가 충분치 못하다는 목소리가 지배적이다. 2017년 감사원은 ‘금융규제개혁 추진실태’ 감사보고서를 통해 "정부는 금융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하기 위해 저해요인으로 지목돼 온 금융규제 개혁을 여러 차례 추진했다"면서 "당초 의도한 목표와 성과를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융시장에서 느끼는 금융 규제개혁의 체감도 역시 낮다는 게 감사원의 지적이다.

금융당국의 규제본능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로는 금융행정상의 편의성이 꼽힌다. 복잡한 법률화 과정을 거치는 것보다 간단하면서도 법률처럼 규제할 수 있는 비명시적 규제가 있으니 개혁이행 속도가 느리다는 것이다. 감사원도 "법령상 규제를 개선하며 계획보다 추진이 지연돼 규제개혁 체감도가 저하될 우려가 있다"며 "행정지도나 자율규제 같은 비명시적 규제를 통한 편의적 규제 관행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없앨 땐 찔끔, 만들 땐 왕창…현장에선 "체감 못한다"

지난해 8월 연장예고된 '겸영신탁회사에 대한 토지신탁 취급 제한 행정지도(연장시행)'. 사진=금융위원회

이런 문제는 금융당국이 대대적인 규제혁신을 공언한 2019년 이후에도 거듭 재현되는 모양새다. ‘겸영신탁회사의 토지신탁 취급제한’이 대표적이다. 금융위는 2015년 은행이나 증권사 등이 토지신탁 업무를 하지 못하게 규제하는 행정지도를 만들었다. 법률에 근거하지 않은 규제로 부적절하다는 비판에 ‘법제화 후 폐지대상’에 올랐다. 하지만 법제화가 늦어지면서 4차례나 연장해 지금까지 운영 중이다.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로 전환하겠다는 금융당국의 발표도 혁신성장에 도움이 될 만큼 체감도가 높지 않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포괄주의’를 전제로 법이 마련돼도 유권해석을 요청하거나 신사업 도전을 위해 규제개선ㆍ완화를 요청하면 법에 관련 조항이 명확히 없다는 ‘열거주의’식 대답이 돌아온다는 주장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산업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는데 본질적인 규제는 그대로"라면서 "현장에서 체감하는 규제가 갈수록 많아지고 있어 당국이 말만 혁신을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2019년 규제개혁 추진 당시 경재계가 요청해 도마에 올랐던 건의과제 18건이 심사를 받긴 했으나 온전히 수용된 사안은 1건(사모펀드·전문투자자 조항)뿐이었다. 수용하되 대안을 제시한 규제가 2건, 일부 수용 1건, 중장기검토 1건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수용곤란 판단이 내려졌다. ‘여신전문금융사의 부수 업무 범위 조정’이나 ‘자본시장법상 소액 집합투자업 업무단위 신설’ 등의 규제요청은 당시 수용곤란 판단을 받은 대표적인 규제다.

전문가들은 금융당국의 규제본능을 바꾸지 않으면 혁신성과가 나기 어렵다고 목소리를 모은다. 이경묵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는 "새롭게 규제해야 할 사안이 생길 수 있고, 기존의 규제 중 풀어주고 없애야 할 게 생기는데 폐지와 개혁에만 소홀하다"면서 "이런 식의 규제혁신은 금융 산업의 제대로 된 발전을 돕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윤 의원도 "2년 전 금융위는 강도 높은 규제혁신을 예고하며 체감도 제고를 강조했지만 규제감축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문"이라면서 "영역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금융빅뱅’ 시점에 보다 전향적인 규제혁신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송승섭 기자 tmdtjq850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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