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 85명, 日기업 16곳 상대 86억 손배소 패소(종합)
[아시아경제 김대현 기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법원이 각하 판결을 했다.
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오후 2시 강제동원 피해자 송모씨 등 85명이 일본제철(옛 신일본제철)과 닛산화학 등 일본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이같이 선고했다.
재판부는 "개인 청구권이 청구권협정에 의해 바로 소멸 또는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다"면서도 "이를 소송으로 행사할 수는 없다. 원고들의 소를 모두 각하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청구권협정 및 관련 양해문서상 문언, 협정의 체결 경위나 후속 조치 등을 고려하면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해당한다"며 "청구권협정 제2조에서 규정하는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문언의 뜻은 개인청구권의 완전한 소멸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한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이는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인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의 소수의견과 결론적으로 동일하다"고 설명했다.
또한 "비엔나협약 제27조에 따르면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는 국내법적 사정만으로, 식민지배의 적법 또는 불법에 관해 상호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청구권협정의 '불이행'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며 "이 사건 청구를 인용한다면 비엔나협약 제27조와 금반언의 원칙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부연했다. 금반언의 원칙이란 이미 밝힌 자기의 언행에 대해서 모순되는 행위를 스스로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한다.
당초 오는 10일로 예정됐던 선고기일이 이날로 앞당겨진 것에 대해선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선고기일 변경은 당사자에게 고지하지 않아도 위법하지 않다"며 "법정의 평온과 안정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선고기일을 변경하고, 소송대리인들에게는 전자송달 및 전화연락 등으로 고지했다"고 전했다.
앞서 지난달 28일 재판부는 "소가 제기된 지 오래된 사건이다. 관련 판례가 대법원에서 나왔고 사실관계도 다 있다"며 첫 변론기일에서 모든 변론을 마치겠다고 결정한 바 있다. 당시 일본기업 측 변호를 맡은 대리인들은 일제히 "선고기일을 늦춰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모두 법률상 문제이고, (원고들이) 워낙 오래 기다리셨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날도 재판부는 "변론속행을 구하는 당사자들이 있으나 이 판결 결과는 민사소송법 제219조에 의해 무변론 소 각하도 가능한 것이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 중 이처럼 여러 기업을 상대로 한 것은 처음이며, 피해자들이 청구한 손해배상금 총액은 86억원이었다. 일본기업들은 피해자들이 지난 2015년 해당 소송을 제기한 뒤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재판부가 최근 공시송달(법원 관보에 내용을 게재해 소송 당사자에게 전달한 것으로 간주하는 제도)을 통해 소장을 전달하자 일본기업들은 뒤늦게 국내 변호사를 소송대리인으로 선임하고 나섰다. 처음 소장이 제출되고 이날 첫 재판이 열리기까지 사건 당사자 10여명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판결을 지켜본 피해 당사자 및 유족 측은 강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장덕환 일제강제노역피해자정의구현전국연합회 대표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며 "선친들이 어떻게 일본인들에게 당했는데 사법부가, 국가가 이러는지 이해가 안된다. 한마디로 말해 자국민 보호하지 않는 국가, 정부"라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오늘 선고가 앞당겨진 것을 당사자들조차 몰랐다"고 덧붙였다.
피해자 측 소송대리인 강길 법무법인 한세 대표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기존 대법원 판결과 정반대로 배치되는 판결"이라며 "항소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지난 2018년 대법원은 강제징용 피해자 고 여운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받아들여 1인당 1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한 바 있다.
강 변호사는 "일단은 강제징용 상태에서 임금도 못 받는, 아주 부당한 상황"이라며 "최소한 당시 임금과 위자료는 배상돼야 한다. 양국 관계도 이를 기초로 재정립돼야 한다"고 부연했다.
김대현 기자 kd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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