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6월 민주항쟁의 현장 걸었죠 아픈 역사 마주하자 지켜야 할 가치 보이네요

한은정 2021. 6. 7.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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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픔 속에서 떠오른 교훈 깊게 느끼는 여행 ‘다크 투어리즘’

표지=서울 남산으로 다크 투어를 떠난 김재신·송현근·윤시현(왼쪽부터) 학생기자. 민주인사들을 수사·고문한 중앙정보부 6국 자리엔 당시 건물의 잔해를 모은 인권광장과 전시실이 생겼다. 전시실 내부에는 지하 취조실도 재현했다. 사진=이승연(오픈스튜디오)

여행 하면 경치 좋은 곳에서 쉬거나 체험을 즐기며 맛있는 음식을 먹는 모습이 떠오르나요. 최근엔 과거를 돌아보고 역사를 바로 보자는 인식이 점차 확산하면서 전쟁·학살 등 비극적 역사의 현장이나 재난과 재해가 일어났던 곳을 돌아보며 교훈을 얻기 위하여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 떠나는 사람들도 많아졌어요. 야외 활동이 많아지는 계절, 가족과 함께 배우고 느낄 수 있는 다크 투어 명소를 둘러보는 건 어떨까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6·10 민주항쟁 기념일을 앞두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생각해볼 수 있는 역사 현장을 찾아가봤습니다.

글=한은정 기자 han.eunjeong@joongang.co.kr, 사진=이승연(오픈스튜디오)·중앙포토, 동행취재=김재신(경기도 낙민초 5)·송현근(서울 고덕중 1)·윤시현(서울 서일초 6) 학생기자, 자료=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예전에는 부끄럽고 아픈 역사는 기억에서 지워야 할 대상으로 여겨졌지만, 최근엔 되짚어보고 반성하자는 의미로 그런 장소를 널리 알리려는 움직임이 많아졌어요. 『체르노빌 다크 투어리즘 가이드』의 저자 아즈마 히로키는 “한 공간에서 일어난 슬픔은 그곳에 가야만 생생히 느낄 수 있다.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을 통해 슬픔은 공유되고 외부에까지 전파된다”고 서술했죠.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는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게 마련이다”란 말이 적혀있어요. 아픈 역사를 끊임없이 기억하며 같은 일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크 투어리즘이 각광받는 이유이기도 해요. 아픔의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알게 되고, 반성하면서 다시는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게 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해준다는 데 의미가 있죠.

다크 투어리즘이 상업화되는 것을 비난하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현장에 담긴 의미가 변질될 경우 사건의 피해 당사자들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길 수도 있기 때문인데요. 1986년 방사능 유출 사고가 발생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은 일부 출입이 허가된 이후 상업적인 목적만을 가진 관광업체들의 자극적인 투어가 성행하면서 사회문화적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는 논쟁이 불거진 적도 있었죠. 관광객의 몰지각한 행동으로 여행 본래의 의미가 변질되는 사례도 늘어났어요. 일부 관광객이 체르노빌 사고 현장에서 속옷 차림 등 우스꽝스러운 사진을 소셜미디어(SNS)에 올리고, 독일 나치가 ‘죽음의 수용소’로 이용했던 아우슈비츠에서 나치 경례 포즈를 취한 사진이 SNS에 올라와 물의를 빚었죠. 비극이 일어난 장소를 여행할 땐 다른 관광지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민주로 가는 고된 여정: 다크 투어

소중 학생기자단이 다크 투어리즘을 해보기 위해 서울 중구에 있는 남산골한옥마을에 모였습니다. 최서향 근현대 역사 탐방 해설사와 함께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장소들을 살펴보기로 했어요. 최 해설사가 “남산에 도대체 어떤 역사의 흔적이 있어 여기서 시작하는지 궁금하지 않냐”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1 남산골한옥마을
- 서울시 중구 퇴계로 34가길 28

케이블카와 서울타워가 있는 관광명소 남산이 가슴 아픈 역사를 지녔다는 사실은 아마 잘 몰랐을 거예요. 이곳에는 일제의 군사 주둔지가 있었어요. 러‧일 전쟁을 일으키며 일제는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라는 조약을 강제로 맺었어요. 간단히 말하면 조선의 땅을 일본이 필요에 의해서 아무 곳이나 쓸 수 있다는 겁니다. 지금 한옥마을 있는 곳에 군대가 머물렀는데 그 이름이 한국주차군사령부예요. 나중에 용산으로 옮겨간 후에는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자리를 잡아요. 일제가 조선을 통치할 때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을 한다든지 공포정치를 담당했던 그 헌병사령부가 이곳에 주둔한 거죠.

일제에게 빼앗겼던 남산, 해방 이후에는 어떻게 됐을까요. 지금처럼 사시사철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 되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5‧16 쿠데타(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를 일으키고 이곳에 수도방위사령부를 만들어요. 수도 서울을 보호하기 위한다는 뜻이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군부대로부터 역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죠. 일제에서 대한민국으로 주체는 바뀌었지만 군사시설이라는 면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늘의 다크 투어는 한국 현대사 중에서도 박정희 정권과 그 뒤를 이은 신군부 전두환 시대의 남산을 이야기할 거예요. ‘치욕의 남산’에서 ‘공포의 남산’으로 변모하는 그 현장으로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2 소릿길 터널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82

소릿길 터널에 들어서면 철문 소리, 타자기 소리, 물소리가 들리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낸다.

남산에서도 악명 높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84m의 터널을 지납니다. 터널에 들어서면 철문 소리, 타자기 소리, 물소리가 들리며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불러내 국가폭력에 의해 인권이 침해된 공간임을 알려줘요. 사람들이 눈을 가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끌려오면 굉장히 공포감을 느꼈겠죠.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통로 끝에 커다란 이중철문이 있어 자동차가 서면 철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대요. 그럼 저 안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기 위해 터널을 지나갈게요.

3 서울특별시청 남산 1별관(중정정보부 제5별관 터)
- 서울시 중구 삼일대로 231

주로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던 중앙정보부 제5별관 대공수사국 자리에서 당시 얘기를 듣고 있는 소중 학생기자단.

서울특별시 중부공원 녹지사업소라고 적혀 있죠. 이곳엔 중앙정보부가 있었는데 현재는 서울시 기관들이 사용하고 있어요.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한 달 후 중앙정보부법을 통해 중앙정보부를 설치해요. 당시 남산에 갔다는 것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것을 의미했죠.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권에 반대하는 민주화 인사들과 권력 내부 감시 대상자, 조작간첩 대상자들을 불법으로 납치하고 고문했습니다. 1981년 신군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로 이름이 바뀌는데 하는 일은 같았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 때 국가정보원으로 변경되죠. 1995년 서초구 내곡동으로 이전하면서 건물 소유권이 서울시로 넘겨졌고, 남아있는 흔적을 통해 중앙정보부 시절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어요.

남산 1별관 건물 뒤편 계단. 중앙정보부가 있던 당시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대공수사국 조사실이 있었다.

지금 여기는 가장 악명 높은 공간 중 하나인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제5별관 대공수사국. 주로 고문으로 간첩을 만들어 내던 곳이에요. 이곳에 끌려왔던 사람들은 철문을 통과해 건물 뒤편까지 차로 이동했어요. 우리도 그들을 따라 뒤로 가볼게요. 지하 2층으로 바로 내려가는 계단을 따라가면 문 안에 조사실이 있었죠. 길이가 50m쯤 되는 긴 복도와 방들이 있는데, 4평 정도의 방 안에는 책상‧욕조‧세면대‧야전침대 같은 게 놓여있었대요.

이곳의 고문은 악명 높아서 ‘다른 데서 받는 고문은 마사지 수준’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는 100일이 넘는 고문 끝에 강제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고 간첩으로 낙인 찍혔죠. 이제 소릿길 터널을 되돌아나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체력 단련하는 실내체육관으로 사용했던 남산체육센터를 지나 본관 건물로 가볼게요.

4 서울유스호스텔과 서울종합방재센터(본관‧제6별관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6

과거 중앙정보부 본관 건물로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현재 서울유스호스텔인 이 건물은 과거 중앙정보부 본관으로 대부분 행정기능을 하는 사무실로 쓰였죠. ‘남산의 부장들’이란 영화를 아시나요. 남산의 부장들은 중앙정보부장을 말하는데, 대통령이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기 위해 청와대를 마주 보는 남산 중턱의 집무실에서 근무해 생긴 호칭이에요. 박정희 정권은 정권 반대 목소리가 커질 때마다 사회질서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한 것처럼 과장해 돌파하려고 했는데 중앙정보부가 이를 주도했습니다.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에는 현재 서울종합방재센터가 있다.
통신을 담당하던 안기부 제1별관 건물은 내곡동으로 이전 후에 폭파·해체됐다.

중앙정보부 제6별관 터에는 서울종합방재센터가 들어섰어요. 당시 지하 3층까지 있지만 지상에는 아무 구조물이 없어 건물의 존재 자체를 알 수 없도록 만들었죠. 지하에는 취조실이 있었는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이 ‘안기부 지하 벙커’라고 부르며 치를 떨었던 곳입니다. 그만큼 수많은 조작과 고문이 이뤄진 현장이죠. 저기 언덕 위에는 원래 제1별관 건물이 있었어요. 스파이 하면 도청‧감청이 떠오르죠. 제1별관이 통신을 담당했는데 내곡동으로 이전하고 폭파‧해체해버려 공터가 됐죠. 왜 안기부의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까요? 자신들의 잘못을 잘 알고 있다는 거겠죠.

5 통감관저 터
- 서울시 중구 퇴계로 26가길 6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남산에는 일제강점기의 아픈 흔적들도 많습니다. 오늘의 주제와 조금 벗어나지만 지나가는 길에 있으니 잠깐 짚어갈게요. 이곳은 1906년 이래 일본의 통감관저가 있던 곳으로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3대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내용의 한일병합조약에 서명한 경술국치의 현장이죠. 1910년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우리나라는 국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이한 2010년 이 터에 표석을 세웠어요. 글씨는 신영복 선생이 쓰셨어요. 치욕의 장소이지만 우리가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곳이죠.

남산을 걷다 보면 경술국치의 현장 통감관저 터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의 터’도 볼 수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고, 그 울림이 팔도에서 돌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옆의 공간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알리고 피해 할머니들을 기억하자며 2016년 8월 29일에 조성한 테마공원입니다. 세상의 배꼽이라고 되어 있는데 중앙에 할머니들이 외친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한글‧일본어‧영어‧중국어로 새겨져 있으며, 그 울림이 팔도에서 모은 돌을 통해 전국에 울려 퍼지는 모습을 형상화했습니다. 앉으면 흔들리는 게 느껴지죠. 작은 파동이 점점 크게 세상으로 번져 나가도록 흔들어보세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죽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지워지는 게 아니잖아요. 다크 투어에는 이런 것을 없애지 말고 기억하며 다시 되풀이하지 말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6 예장공원‧기억 6(중앙정보부 6국 터)
- 서울시 중구 소파로 148-10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곳에는 당시 잔해들을 모아둔 마당과 빨간 대형 우체통 모양의 전시실 ‘기억6’이 생겼다.
‘기억 6’ 전시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다.
‘기억 6’ 전시실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다.
전시실에 들어가면 당시 수사와 고문이 이뤄진 6국 지하 취조실도 재현돼 있다.

남산에서의 마지막 코스는 예장공원인데요. 학원사찰‧수사를 담당한 중앙정보부 6국이 있던 곳입니다. 주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대학생들이 끌려왔는데 박정희 정권 시절 악명 높은 인권 유린 사건 가운데 하나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일어난 곳이죠. 2017년 서울시는 이 건물을 철거하고 ‘부끄러운 역사를 기억하자’는 취지에서 ‘기억6’으로 명명하고 빨간 대형 우체통 모양 전시실을 만들었죠. 안에 들어가면 중앙정보부에서 국민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려주는 영상을 볼 수 있어요. 당시 수사와 고문이 이뤄진 6국 지하 취조실도 재현했죠. 옛 건물에서 나온 벽돌과 부서진 조각, 녹슨 철근과 기둥 잔해 따위가 모여서 마당이 되고 6개 의자가 되었습니다. 빨간 의자에 앉아 역사에 말을 걸어보세요. 역사는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걸지 않을 때 역사가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하면 우리의 사회는 어떤 세상이 될지 생각해 보세요.

7 명동성당
- 서울시 중구 명동길 74

역사를 바로 알고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다크 투어를 떠난 윤시현·김재신·송현근 학생기자(왼쪽부터). 6·10 민주항쟁의 현장 명동성당을 찾아 과거 사진과 비교하며 34년 전 그날을 떠올려봤다.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학생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죽는 사건이 발생했어요. 경찰은 처음엔 사건을 속이려고 ‘책상을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며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지만, 결국 진실이 드러났죠. 이 사건은 오랫동안 억눌려 있던 민주화 운동에 불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어요. 그해 4월 13일 독재 정권은 재집권을 위해 호헌(헌법을 지킨다) 조치를 발표했는데, 당시 헌법에는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로 되어 있었어요. 국민들은 직접 대통령을 뽑을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길 바랐는데 전두환 정권이 무시한 거죠.
이에 맞서 국민들은 6월 10일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입니다. 6월 9일엔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는 사건도 일어나며 수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에 함께했어요. 당시 여당 대통령 후보였던 노태우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 ‘6‧29 선언’까지 항쟁은 약 20일간 이어졌습니다. 연인원 500여만 명이 참가했고, 절정이던 6월 26일 ‘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7개 도시 130여만 명이 거리에 나섰어요.

6월 민주항쟁과 천주교 명동성당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요.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 미사에서 박종철 고문치사와 관련된 경찰의 은폐 조작을 폭로했습니다. 6월 10일, 범국민 규탄대회가 열리며 명동 주변에서 치열한 시위가 벌어졌는데요. 경찰에 밀리던 시위대는 명동성당으로 들어왔어요. 15일까지 명동성당에서 농성이 진행되고 이러한 사실이 보도되면서 전 국민의 관심을 집중시켜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어요. 명동성당은 민주주의와 사회 정의의 상징적인 공간이 됐죠.

8 향린교회
- 서울시 중구 명동 13길 27-5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6월 3일 향린교회 출입문 기둥에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설치됐다.

6월 민주항쟁에서 구심점 역할을 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이하 국민운동본부)가 탄생한 곳이에요. 당시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모여 국민운동본부를 만들기로 하고 결성식을 열어야 하는데, 명동성당‧성공회성당 등 할 만한 장소에는 경찰들이 쫙 깔려 있었죠. 딱 한 곳 경찰들이 안 지킨 향린교회서 1987년 5월 27일 재야인사 150여 명은 무사히 결성식을 마쳐요. ‘향린교회’라고 쓴 쪽지를 전달해서 장소를 안내했다고 해요. 이날을 기념해 6월 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6월 3일 향린교회 출입문 기둥에 ‘6월 민주항쟁 기념비’가 설치되었습니다.

9 서울광장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110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마다 시민들이 모여 함께 행동한 서울광장에서 포즈를 취한 윤시현·김재신·송현근 학생기자(왼쪽부터).

서울광장은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시민들이 모여 함께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온 역사적인 장소죠.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했던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하며 미국의 워싱턴DC를 벤치마킹해 대한문 앞에 도로와 광장, 환구단을 만들었습니다. 이때부터 광장은 고종 보호 시위, 1919년 3·1운동, 1960년 4·19혁명, 1964년 한일회담 반대 시위, 1987년 6월 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시민들의 주요 무대가 됐어요.

10 성공회성당
- 서울시 중구 세종대로 21길 15

1987년 6월 성공회성당에서 울려 퍼진 종소리를 시작으로 도심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다.

1987년 6월 10일 이곳에서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렸어요. 오후 6시, 성공회성당에서 마흔두 번의 종이 울렸습니다. 1945년 해방 후 분단과 독재로 얼룩진 세월이 42년이나 되었으며, 이제 그러한 세월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소리였죠. 종소리와 함께 도로를 메운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습니다. 6월 항쟁의 시작이었어요. 도심 곳곳에서는 수백 명 또는 수천 명 단위의 학생과 시민이 집회와 시위를 전개했죠. 이날을 기념하여 6‧10 민주항쟁 10주년이었던 1997년 6월 10일 성공회대성당 뒤편 화단에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지석이 설치되었습니다. 한번 읽어 볼까요. ‘유월민주항쟁이 이 자리에서 시작되어 마침내 민주화의 새 역사를 열다.’

소중 학생기자단의 길라잡이가 되어준 최서향 근현대 역사탐방 해설사.

투어를 마치고 궁금한 점을 질문하며 소감을 듣는 시간을 가진 후 최 해설사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때로 돌아간다면 무서움에 떨며 투쟁할 것 같나요, 아니면 방관자가 될 것 같나요?” 윤시현 학생기자는 “같이 투쟁할 거예요!”라고 씩씩하게 답했고, 김재신 학생기자는 잠깐 고민한 후에 “고문의 후유증이 있더라도 죽지만 않는다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답했죠. 송현근 학생기자도 “같이 싸울 것 같아요”라고 얘기했습니다. “나는 그 당시를 살았는데 방관자였거든요. 앞에 서 있지 않고 그 주변에서 무서워하며 바라만 보는 사람이었죠. 세월이 흘러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을 보면서 이렇게 있으면 안 되겠다 생각이 들고 우리의 근현대사를 알려야겠다고 뒤늦게 생각이 들었죠.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 용감하네요. 박수 쳐주고 싶어요.” 다 같이 우렁찬 박수로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떠난 다크 투어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 대표적인 다크 투어리즘 여행지

「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폴란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 정권에 의해 1945년 기준 약 600만 명(유럽 전체 유대인의 80%)이 학살당한 곳. 당시 사용했던 가스실‧철벽‧고문실 등이 남아 있고 전시실에는 희생자들의 유품과 머리카락 등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원자로가 폭발하고, 이 사고로 인해 대량의 방사능이 누출됐습니다. 사고 후 1년 내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사망한 사람이 최대 2만5000여 명에 이를 정도로 피해가 컸죠. 예전에 비해 방사능 수치도 현저하게 낮아져 이곳을 투어하는 프로그램도 생겨 시간이 멈춘 듯한 도시의 모습을 생생히 볼 수 있습니다.

미국 911 메모리얼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서 일어난 테러의 아픔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폭포와 호수를 만들고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었고, 테러 당시 불에 탄 물품 등은 같이 만들어진 박물관에 전시됐어요.

이탈리아 폼페이 최후의 날

이탈리아 폼페이

약 23km 떨어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순식간에 7m 깊이의 화산재에 묻혀버린 폼페이는 16세기 말 발견돼 현재까지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죠.

캄보디아 킬링필드
킬링필드는 캄보디아의 공산주의 무장단체 크메르루즈가 1975∼1979년 캄보디아 인구의 4분의 1에 달하는 자국민 200만 명을 학살한 사건입니다. 위령탑 근처엔 학살당한 이들의 유골과 사람을 묻었던 구덩이 등이 남아있죠.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국내 대표 다크 투어리즘 장소. 일제강점기 때 독립운동뿐 아니라 광복 이후 정치적 격변과 민주화 운동에 이르는 근현대사의 고난과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곳입니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15만여 명, 중국군 2만 명 등 최대 17만여 명이 수용돼 있던 곳. 당시 상황을 재현한 모습과 남아 있는 옛 막사와 피엑스(PX) 건물터 등을 볼 수 있어요.

제주 4‧3 평화공원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 7개월간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곳.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여행을 통해 아픈 역사를 배우고 희생자들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취재하면서 현재 미얀마에서 일어나는 사건도 떠올렸죠.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도 미얀마와 같은 사태가 일어났다는 것을 처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았는데, 취재하며 우리나라에도 그런 암흑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당시 고문실에 끌려간 사람들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하며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신 희생자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여전히 지금 미얀마와 같은 상황에 있지 않을까요. 미얀마 국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 보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김재신(경기도 낙민초 5) 학생기자

취재 전에는 6월 항쟁에 대해 단순히 전두환 정부에 맞선 민주화 운동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역사적 배경이나 독재 정치의 잔인함을 알고 나니 그 시절 국민의 공포나 분노 같은 감정이 더 잘 이해된 것 같아요. 명동성당‧성공회성당 등 시위대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 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시위가 성공했다는 게 인상 깊었죠.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분들과 이름 모를 수많은 시민들의 피와 노력이 헛되지 않아 다행이에요. 최근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로 인해 많은 미얀마 국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하는 시간도 가져봤습니다. 송현근(서울 고덕중 1) 학생기자

‘여행’이라고 하면 즐겁고 신나는 것만 떠올렸는데, 우리나라의 아픈 역사를 여행한다니, 처음에는 낯설기만 했어요. 늘 익숙하던 명동성당‧서울광장‧남산 같은 장소들에 무슨 이야기들이 숨어 있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죠, 해설사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걷다 보니 정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어요.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가 정말 많은 분의 노력과 희생으로 얻은 것이라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들을 수 있었거든요. 요즘 학교에서도 역사를 배우고 있어서 관심이 많은데, 교과서에 담겨 있지 않은 많은 이야기를 듣고, 질문할 수 있는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다크 투어리즘’을 여러분도 꼭 경험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윤시현(서울 서일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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