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주목하는 건 '기도의 시간'.. 쌓인 만큼 능력 발휘해

2021. 6. 7.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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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영적위기를 돌파하라 <1>
서울 화양감리교회 청년들이 2019년 8월 서울 광진구 교회에서 열린 청년부흥회에서 찬양하고 있다.


1970년대 아버지(최덕순 목사)는 충남 공주에서 개척 목회를 하셨다. 공주사대 근처에서 목회하면서 끼니를 먹지 못하는 어려운 이들에게 밥을 해주셨다.

교회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기에 그들에게 밥을 해주고 나면 쌀이 떨어졌다. 가족 모두 굶었다. 어머니가 임신했을 때도 밥조차 넉넉히 드시지 못했다. 그야말로 흙수저 같은 삶이었다.

결국 세 아들을 도저히 키울 수 없는 한계상황까지 왔다. 사정을 들은 권사님이 한 아이를 대신 키워주겠다고 제안했다. 형은 장남이어서 보낼 수 없었고 동생은 막내라서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시 4살이었던 내가 뽑혔다. 그때부터 부모님과 생이별했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선택한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많이 울었던 것 같다.

2년을 권사님 댁에서 자랐다. 부모님께서 나를 다시 데리러 오셨다. “2년간 상훈이랑 같이 살았더니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잘 키울 테니 아예 저희 가족에게 입양시키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머니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시며 요청을 뿌리쳤다.

그렇게 평범하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부모님은 70년대 후반 서울 관악구 신림동, 당시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달동네에서 교회를 개척하셨다. 집은 달동네 꼭대기에 있었다.

학교 끝나면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교회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좋았다. 움막 같은 집에 있는 것보다 교회 예배당에 있는 것이 행복하고 좋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에 들러서 기도하고 집에 갔다. 짧게는 하루 1시간씩 기도했고 점점 기도의 양이 많아져 하루에 3시간, 4시간씩 기도하는 날도 적지 않았다. 기도하다가 눈을 떠보면 2~3시간이 지났던 일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가 컸다. 주님께 무언가 드리고 싶은데 가난한 형편에 드릴 것이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게 새벽 신문 배달과 우유배달이었다. 겨울엔 찹쌀떡 장사를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그 돈을 헌금으로 정성껏 드렸다.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주님께서는 내가 기도했던 모든 시간과 주님께 드린 것을 기억하시고 주목하고 계셨다. 기도가 쌓이면 신기하게도 능력을 부어 주신다는 사실도 점차 알아가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 미술이 참 좋았다. 피아노학원에 너무 다니고 싶었지만 집안이 가난해서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오다가 피아노학원 앞에 앉아서 30분 정도 멍하니 바라본 적도 있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피아노학원에 가신다고 했다. 개척교회에 반주할 사람이 없어서였다. 어머니가 학원에서 가져오신 바이엘 교본을 놓고 기도한 다음 무조건 피아노를 쳤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교회 반주를 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학교 합창단 반주, 군대에서도 성가대 반주를 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기도의 능력을 믿는다. 특별한 환상이나 경험은 없어도 기도할 때마다 주님께서 위로하시고 함께하심을 느낀다. 하루는 친구들과 경북 안동에 있는 어떤 목사님 댁으로 놀러 갔다. 오토바이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나에게 오토바이를 타고 저 멀리 산으로 가보자고 했다.

예전에 몇 번 타본 경험이 있어서 오토바이를 몰았다. 절벽 근처의 언덕을 올라가는데 뒤에 탄 친구들이 나한테 빨리 잘 달린다고 추켜세웠다. 그래서 더 빨리 달리면 더 멋져 보일 것 같아 속력을 높였다. 그런데 속도를 내다가 그만 원심력 때문에 튕겨 나가고 말았다.

오토바이는 박살이 났다. 다행히 친구는 바로 도로에 넘어졌지만 나는 절벽 밑으로 떨어졌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타박상만 입고 거의 다치지는 않은 것이다. 오토바이를 폐기할 정도였는데 말이다.

그날 밤 기도를 드렸다. 문득 매일 기도했던 옛 모습이 슬라이드처럼 떠올랐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고 지키셨구나.” 이때부터 쌓여진 기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생겼다.

이후 오토바이 사고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또 한 번의 큰 사고를 경험했다. 1994년 막내 동생의 입대를 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상훈아, 차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고 가거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음성이었다.

‘아니, 편하게 갈 수 있는 차를 두고 내리라니요. 지금 내리면 상황이 난처합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가족들에게 둘러대고 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그날 저녁 놀라운 사건이 벌어졌다. 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가족 모두가 큰 사고를 당한 것이다.

가족이 탄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오른쪽 조수석 쪽으로 상대차와 충돌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졌다. 가족들은 모두 중상을 입었다. 만약 그때 오른쪽 조수석에 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이 사건은 훗날 선교사로 결단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최상훈 목사(서울 화양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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