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의 학살' 그림탓.. 피카소가 한국서 겪은 수난사

손영옥 2021. 5. 23. 2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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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전당 '피카소 탄생 140주년'전
원작, 70년 만에 국내 첫 선
입체파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이 1951년 파리에서 처음 공개된 이후 70년 만에 한국으로 건너왔다. 피카소가 6·25전쟁 초기 미군의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것으로 전해진다. 아래는 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참고한 에두아르 마네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1867년). 이들 그림을 포함한 파리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품이 예술의전당에서 소개되고 있다. 비채아트뮤지엄 제공


1951년 부산 피란지. 월남한 35세의 서양화가 김병기는 남포동 어느 다방에서 시인과 화가들을 모아놓고 ‘피카소의 결별’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이 쓴 편지를 낭독했다. 소설가 공초 오상순과 조각가 차근호 등 20여명이 모인 자리였다. 김병기가 입체파 창시자로 당시 한국 화단의 우상이었던 스페인 출신 파블로 피카소(1881∼1973)에게 굿바이를 외친 것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을 통해 피카소가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은 피카소가 51년 1월 멀리 한국의 황해도 신천리에서 일어난 미군의 양민 학살 소식을 신문에서 읽고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피카소는 프랑스 파리에서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다.

평양 갑부 집안 출신으로 부산에 피난 온 김병기는 회고록에서 “피카소가 한국전쟁을 너무 관념적이고 피상적으로 본 것 같아 나는 이 점을 지적하고자 했다”고 편지 쓴 취지를 밝혔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냉전시대 반공법을 이유로 국내에 반입되지 못했다. 국공립미술관에서 여러 차례 반입을 시도했지만 불발됐다.

이 작품을 포함한 국립피카소미술관 소장 피카소 작품 110점이 한국에 왔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하는 ‘파카소 탄생 140주년’전에서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51년 5월 프랑스 살롱 드 메이에서 발표된 뒤 70년 만에 처음으로 원작이 한국에 소개된다.

시간이 흐르며 ‘피카소와의 결별’은 작품 오독에 의한 일종의 해프닝임이 연구자들에 의해 밝혀졌다. 피카소가 서양미술사의 걸작인 고야의 ‘1808년 5월 3일’, 마네의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등을 오마주해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은 무장한 기계화 부대가 벌거벗은 양민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을 담았다. 기계화 부대는 미군을 의미하며 그런 미군이 한국인을 학살했다는 해석이었지만 기계화 부대의 국적을 특정할 수 있는 건 전혀 없다.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에서 프랑스가 옹립한 멕시코 황제에 총구를 겨누는 군인에게 프랑스군복을 입혀 국적을 특정화한 것과 차이가 난다.

따라서 이 작품은 피카소 반전 예술 3대 걸작 중 하나이며 스페인 내전을 소재로 한 ‘게르카’(1937), 제2차 세계대전을 그린 ‘시체안치소’(1944∼1946)와 더불어 전쟁의 참상 자체를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작품 속에서 여인들은 나체이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아이들은 겁에 질려 엄마한테 매달려 있고 임신한 여인도 보인다. 이런 도상과 ‘기계 인간’의 무정함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피카소 연구의 권위자인 서울대 미대 정영목 명예교수도 20일 “신천 학살 사건은 50년 10∼12월 일어났고 이 작품은 51년 1월에 완성됐다. 폭 2m 대작인 만큼 드로잉을 포함해 물리적으로 2∼3개월은 걸린다”며 신천 학살사건 연관설을 반박했다.

오독 해프닝에 피카소가 프랑스 공산당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더해지며 ‘피카소’는 냉전시대 우리 사회에서 금기어가 됐다. 크레용 이름에도, 다방 이름에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냉전이 격화되기 전까지 일본 유학을 통해 서양미술을 접한 한국의 많은 화가에게 피카소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피카소가 현실을 닮게 재현하는 미술에서 벗어나 다시점을 적용하는 입체파를 창시했기 때문이다.

연인을 그린 ‘마리 테레즈의 초상’(1937년). 비채아트뮤지엄 제공


미술사학자 조은정씨는 “부부 화가였던 김기창 박래현은 해방 이후 채색화에 따라다닌 일제 잔재라는 오명을 불식하기 위해 혁신의 방법으로 입체파를 수용한 작품을 선보였다”며 “종군화가들도 전쟁의 참상을 전하기 위해 피카소 ‘게르니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제작하거나 서양화가 권옥연 심죽자 등이 입체파 영향을 받은 작품을 남겼다”고 말했다.

작품을 대여해온 국립피카소미술관은 최근 이건희 컬렉션 기증 과정에서 언론과 미술 전문가들에 의해 하나의 모델로 언급되며 주목을 받았다.

이 미술관은 피카소 사망 직후 유족이 부과된 막대한 상속세를 대신해 프랑스 정부에 기증한 작품들을 모아 85년 문을 열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은 제작 시기에서 초기 실험적 단계부터 말기까지, 형식에서 회화부터 조각 도자기 판화까지 종합선물세트처럼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입체파가 정립되기 이전 작품과 나무와 종이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 입체파의 원형인 1907년 작 ‘아비뇽의 처녀들’과 유사한 작품 등을 볼 수 있다. 피카소가 입체파 형식을 정립하기 위해 실험을 더욱 밀어붙이며 형태를 해체했던, 30대 시절의 분석적 입체주의 작품은 1점만 나온 건 아쉽다. 그래서 풋풋한 맛은 덜하고 전성기와 노년기의 농익은 작품 세계를 보는 기분이 강하다. 8월 29일까지. 유료.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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