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곳 잃은 아이 키워 결혼까지.. 스님들은 기꺼이 '부모'가 됐다

김지숙 2021. 5. 18.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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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사람들을 위한 안식처, 인천 최초 비구니 사찰 '부용사'

[김지숙]

 1대 만선 스님은 6.25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을 위한 쉼터로 사찰을 제공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의지할 곳 없는 이들도 기꺼이 안았다.
ⓒ 김지숙
 
인천 미추홀구 수봉산자락에는 긴 세월 말없이 세상을 품어온 절이 있다. 인천 최초 비구니 사찰인 부용사다. 절이 창건된 이후 지금까지 소외된 이들에게 곁을 내어주며 등불을 밝혀 주었다. 5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그곳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따사롭고 아늑한 풍경... 한국전쟁 고아들 안아주던 자비의 도량

수봉 문화회관으로 가는 언덕길 중간. 차오르는 숨을 고르고 허리를 편다. 잠시 고갤 들어 오른편을 바라보자 일주문 너머 햇살 가득 내려앉은 뜰이 보였다. 일주문 넘어 경내에 이르자 세상 모든 소란과 번잡이 한꺼번에 사라진다. 천천히 걸어 요사채 앞에 섰다. 살뜰히 보살핀 화분 몇 개가 옹기종기 모여 길손을 반긴다. 대단한 무엇이 있는 건 아니지만 정갈하고 아늑한 절 풍경에 마음 한켠이 따스해진다.

부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금강산 법귀암에서 수행했던 만선 스님이 1926년에 창건했다. 1920년대에는 수봉산을 영산이라 불렀고, 자그마한 이 절터 외 주변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현재 경내에는 대웅전, 응진전(1957년 나안전), 요사채 등이 자리한다.
 
 부용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소속 사찰로 금강산 법귀암에서 수행했던 만선 스님이 1926년에 창건했다.
ⓒ 김지숙
 
부용사는 인천 최초 비구니 사찰이다. 1대 만선 스님은 6.25 한국전쟁 이후 피난민들을 위한 쉼터로 사찰을 제공했다. 전쟁으로 부모를 잃거나 의지할 곳 없는 이들도 기꺼이 안았다. 주지인 선덕 스님은 "전쟁 이후 부모 잃은 아이들 40~50명과 지내며 탁발해 밥을 먹이셨죠. 나중에 부모가 찾아간 아이도 있고 그렇지 못한 아이는 이곳에 남아 함께 살았다"며 설명했다.

부용사에서 어려운 아이들을 돌본다는 입소문이 퍼지자 갈 곳 없는 이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았다. 아이들의 경우 돌보고 밥해 먹이는 것에서 벗어나 교육과 결혼도 시켰다. 오갈 곳 없는 이들에게 품을 내어주며 어머니의 마음 그대로 그들의 위로가 되어줬다. 만선 스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였던 육연 스님 역시 스승의 뜻을 이어갔다.

선덕 스님은 "그 시절 일반가정에도 학교에 못가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런데 두 분 스님께서는 이곳 아이들을 기죽이지 않으려고 학교도 보내면서 부모 못지않게 키우셨다"며 "마지막까지 있던 아이가 세 살 때 이곳에 와 서른다섯에 독립했다"라고 전했다.

이후 어렵고 힘든 시절이 지나자 스님들은 시대와 상황에 맞는 소임을 다해왔다. 최근 선덕 스님은 '한문학당'과 '템플스테이'를 운영했다. 한문학당의 경우 공부에만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심성에 도움을 주기 위해 문을 열었다.

스님은 "꾸준히 공부하러 온 학생 중 4학년 남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 보았다"며 "우리가 너무 밖으로만 치우쳐 있는 면이 있는데 심성을 발현시켜 행복해지는 것은 물론 꽃도 피울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템플스테이 역시 쉼 없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스님의 마음에서 시작됐다. 현재 코로나19로 모두 중단된 상태이지만 가능한 때에 재개할 예정이다.

길손도 쉬어가는 고요한 안식처 되길
 
 부용사 템플스테이는 쉼 없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잠시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길 바라는 스님의 마음에서 시작됐다.
ⓒ 김지숙
 
긴 시간 마음으로, 또 손길로 사람들을 돌보던 부용사는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무언가 직접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더라도 곁을 내어주고 싶은 마음은 늘 한결같다. 많은 시민들이 찾아와 쉬어가며 마음을 새로이 하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란다.

"선대 스님들은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직접 힘을 주셨지만, 지금은 포교를 떠나 사람들이 와서 스스로 편안함을 얻고 재충전해 갈 수 있는 장소가 되길 바랍니다."

선덕 스님과의 이야기를 마치고 뜰에 나와 고갤 드니 수십 개 연등이 바람결에 춤을 춘다. 스님에게 등을 밝히는 의미에 대해 여쭈었다. 그는 '어둠과 미혹한 부분을 밝히기 위함'이라고 대답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마음의 어두움을 밝히는 것이지요. 나로부터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밝아져 바른길도 가고, 모두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어요. 밝아지면 이겨낼 수 있고 넘어지지 않고 갈 수도 있잖아요."

돌아서는 길, 마음이 환하다. 스님의 넉넉한 한 마디와 뜰에서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숨결이 그저 '괜찮다'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 같다.

■ 부용사 가는 길 : 미추홀구 수봉북로 34
 
 부용사는 인천 최초 비구니 사찰이다. 절이 창건된 이후 지금까지 소외된 이들에게 곁을 내어주며 등불을 밝혀 주고 있다.
ⓒ 김지숙
  
 부용사는 오갈 곳 없는 이들에게 품을 내어주며 그들의 위로가 되어줬다. 만선 스님이 돌아가시자 그의 제자였던 육연 스님 역시 스승의 뜻을 이어갔다.
ⓒ 김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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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i-View 객원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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