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상실 전염병 걸린 남자가 기억하는 것, 왜 사과였을까
[김준모 기자]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 <애플>로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당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영화제에서 영화를 본 이들은 그를 향해 '제2의 요르고스 란티모스'라는 찬사를 쏟아내기도 했다. 2009년 <송곳니>로 전 세계에서 충격을 안긴 요르고스 란티모스는 이후 <랍스터>와 <더 페이버릿>으로 세계적인 거장 반열에 오른 감독이다.
재난을 소재로 한 작품은 개인적인 측면에 집중한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알리스는 라디오를 통해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이 유행병처럼 번진다는 소식을 듣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들은 신분을 증명할 무언가를 지니고 있지 않으면 병원으로 가게 된다. 버스 안에서 잠든 알리스는 종점에서 깨어난 후 기억을 잃는다. 신분을 증명할 그 무엇도 지니고 있지 않던 그는 병원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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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스틸컷 |
ⓒ (주)다자인소프트 |
새 인생을 살아가던 알리스는 자신과 같은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안나를 만난다. 운전, 수영, 클럽 등 안나와 다양한 추억을 쌓아가는 알리스는 새로운 기억을 쌓으며 한 가지 공포를 느낀다. 바로 기억의 회복이다. 이 작품이 재난영화인 이유는 기억의 소멸은 개인의 죽음과 같기 때문이다. 정체성을 잃어버린 개인은 사회화 과정에서 경험했던 모든 감정과 규칙을 잃어버린다. 외형만 사람일뿐 내면은 텅 비게 된다.
작품은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며 기억의 소멸과 재생성의 과정을 담아낸다. 소멸이 절망적이지도, 재생성이 희망적이지도 않다. 이전의 자신을 모르는 알리스에게 추억이 사라졌다는 건 고통과 거리가 멀다. 그는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 역시 불완전한 체험의 연속임을 인지하며 우울을 느낀다. 영화는 전자기기를 배제한 아날로그 감정을 통해 허무주의나 실존주의 같은 철학적인 영역을 문학적인 정취로 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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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플> 스틸컷 |
ⓒ (주)다자인소프트 |
하지만 안나를 만난 뒤 그에게 있어 사과의 의미는 변한다. 사과가 기억을 되찾게 만드는 효능이 있다는 말을 들은 알리스는 장바구니의 사과를 다시 되돌린다. 포스터 속 벗겨진 사과 껍질처럼 알리스는 자신의 뇌 속 기억을 보길 바랐다. 안나를 만난 후에는 그 껍질을 벗기는 걸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우리가 기억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알리스는 인생 배우기 프로젝트에서 좋은 기억만 배우는 게 아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와 함께 생활하는 등 슬픔의 감정 역시 함께 배운다. 이 과정은 좋은 기억도, 나쁜 기억도 우리가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다소 무거운 주제임에도 기억을 잃은 알리스의 독특한 행동은 블랙코미디의 형태로 쓴웃음을 유발한다. 알리스가 우주복을 입은 모습이나, 사고를 낸 뒤 운전경험이라며 사진촬영을 하는 안나의 모습은 작품에 흠뻑 빠지기 보다는 거리를 두고 주제의식을 사유할 수 있도록 한다.
작품은 수미상관의 구조를 통해 기억에 관한 우화(寓話)를 완성한다. 이 결말은 알리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상상할 수 있게 하며 '우리의 기억은 얼마나 선택적인가'에 대한 질문을 곱씹게 만든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타인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는 요즘, 이 영화가 선보이는 재난 상황은 정체성에 대한 진중한 탐구로 깊은 고민을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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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준모 씨네리와인드 기자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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