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자발적 연합" 웨일스의 개혁은 어디까지 갈까
[권신영 기자]
코로나19의 다른 이름은 '사회 개혁의 기회'다. 축적된 불평등의 문제가 여과없이 고스란히 드러남에 따라 개혁에 대한 사회적 동감대가 광범위하게 형성됐기 때문이다. 위기를 개혁의 동력으로 전환시킨 대표적 정치인은 미국 바이든 대통령이다. 민주당 경선부터 대통령 취임까지 무색에 가까운 온건 중도였지만, 국내 정책에서만큼은 1930년대 프랭클린 루즈벨트와 비견되는 과감한 개혁안을 발표했다. 예측을 뛰어넘는 개혁 강도에 혹자는 그를 두고 "마스크를 벗었다"는 평을 내린다.
비슷한 맥락에서 영국에도 주목할 만한 정치인이 있다. 영국 웨일스 장관이자 웨일스 노동당 대표 마크 드레이크포드(Mark Drakeford)다. 그는 지방 선거에서 노동당의 웨일스 의회 과반 확보(60석 중 30석)에 성공, 개혁의 발판을 마련했다. 경제 영역에서는 기본소득제(Universal basic income) 시범 실행, 정치 영역에서는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를 "자발적 연합 (voluntary union)"으로의 전환을 목표로 하고 있다.
▲ 영국 웨일즈 장관이자 웨일즈 노동당 대표 마크 드레이크포드. |
ⓒ 마크드레이크포드 트위터 |
5월 12일 선거 후 첫 웨일스 의회 연설에서 드레이크포드는 "새롭고 용감한 아이디어를 고려하겠다"라고 말했다. "기본소득, 주택, 환경"을 따로 언급하며 "영국 정부와 파트너십"을 가지고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본 소득제는 이중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으로, 직장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든 이가 일정 정도의 돈을 정기적으로 받는 제도다. 2017년 스코틀랜드가 글라스고 등 몇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자 웨일스도 기본소득제를 검토했다. 당시 웨일스 재무부장관이었던 드레이크포드는 빈곤과 불평등 개선 방안으로 기본소득제를 "매력적"이라고 평하면서도 대중을 설득하는 과정이 지난할 것이라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반면, 마가렛 대처 수상의 경제 고문이었던 경제학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 불가능한 제도"라며 웨일스가 "스코틀랜드처럼 과도하게 비싼 사회주의 실험"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운을 띄우는 단계에 있었던 2017년 기본 소득제 논의는 2021년 코로나 위기와 지방 선거를 거치면서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웨일스 의원 60명 중 25명이 이미 기본소득제 지지 의사를 밝혔다.
기본소득제에 서명한 노동당 의원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팬데믹동안 심각하게 악화된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 현재의 복지 제도로는 불가능하다. 개혁의 출발점으로 기본소득제를 시험해보고 이것이 사회 저소득층에 끼치는 영향을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자유민주당 의원은 "기본소득제는 웨일스 주민의 삶을 전환시킬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을 빈곤, 스트레스, 불확실성으로부터 벗어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웨일스 대변인은 "이것을 웨일스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영국 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복지 시스템은 웨일스로 이양된 권한이 아니"라며, 영국 중앙 정부의 동의가 선행돼야 함을 밝혔다.
유감스럽게도 재무장관 리쉬 수낙(Rishi Sunak)은 현상황은 취약한 계층에 집중해야 할 시기라며 기본 소득제에 대한 반대 의견을 표했다. 영국 정부의 협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웨일스가 기본 소득제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자치권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은 기존 잉글랜드-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간의 권한을 재조정하는 정치 개혁이 동반돼야 한다는 뜻이다.
이 문제로 현재 보리스 존슨 수상은 스코틀랜드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다. 2020년 11월, 수상 보리스 존슨은 1997년 자치권 일부를 내준 노동당 토니 블레어 수상의 결정을 "가장 큰 실수"라고 평하며, 불편한 심기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정도다. 여기에 웨일스 드레이크포드가 웨일스 민족주의를 내밀며 가세한다면, 보리스 존슨이 받는 압박의 수위는 한층 높아질 것이다.
웨일스 민족주의
웨일스 독립을 목표로 결성된 웨일스당(Plaid Cymru, 1925년)이 있지만 웨일스 민족주의는 스코틀랜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게 평가받아 왔다. 그런 웨일스의 민족주의가 실체적 힘을 발휘한 건 1960년대 웨일스 케이플 셀린(Capel Celyn) 수몰 사건을 통해서다.
이 사건은 1960년, 리버풀 시가 리버풀과 위럴 지역의 식수원이 필요하다며 케이플 실린 마을 강제 수몰 계획을 개별적으로 의회에 제출하면서 시작된다. 일체의 권한을 위임받은 리버풀은 웨일스와 상의하지 않은 채 단독으로 수몰 계획을 추진했다. 웨일스 지역 국회 의원이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결국 1962년 의회를 통과, 1965년 이 마을은 수몰돼 저수지가 됐다.
잉글랜드 대도시의 식수해결을 위해 웨일스의 마을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킨 사건을 계기로 터진 웨일스 민족주의는 이후 스코틀랜드와 같이 1970~1980년대 권력 이양(devolution)을 지속적으로 요구한다. 1997년 노동당 토니 블레어는 총선에서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자치권을 국민 투표에 부치겠다고 공약, 1997년 9월 18일에 국민 투표가 이뤄졌다. 50.3%의 지지로 통과, 웨일스는 언어(문화), 농업, 어업, 교육, 주택 일부 분야에서 입법권을 확보한다.
이후 잠잠해졌던 웨일스 민족주의가 다시 꿈틀거리고 있다. 6년 전까지만 해도 3%에 불과했던 독립 지지 수치가 2021년 3월에는 39%까지 올라가고 1965년 수몰된 케이플 셀린 동네를 기억하라는 문구가 여기저기 등장했다(<가디언>, 2021년 4월 25일).
현저하게 증가하는 독립 지지 비율의 뒤에는 코로나 위기가 있다. 2021년 보리스 존슨은 웨일스와 사전 상의없이 "집에 머물러라 (stay at home)"를 "주의해라 (stay alert)"로 낮추었고, 드레이크포드가 이에 반발, 웨일스는 그대로 "집에 머물러라"를 유지했다. 전 사회가 예민한 상황에서 영국 정부의 일방 통행이 반잉글랜드 정서를 건드렸다. 게다가 코로나 재확산을 겪은 잉글랜드와 대조적으로 웨일스는 안정적으로 코로나 방역에 성공하면서 독자적 행보에 대한 자신감과 웨일스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아졌다.
▲ 영국 웨일스 북부 랜디드노에서 염소 한 마리가 코로나19 여파로 문을 닫은 상점 옆을 지나고 있다. |
ⓒ 연합뉴스/AP |
2020년 5월 15일, BBC는 드레이크포드와의 인터뷰에서 "민족주의자가 되면 당신이 원하는 사회주의적 이상을 웨일스에서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는가?"라고 물었다.
정교한 이중 질문이다. 우선 이것은 웨일스 노동당의 정체성을 묻는다. 민족주의에 잠재된 배타성과 국수성을 경계해 온 노동당 지도부에 속해있지만 웨일스인으로서 그의 웨일스 정체성을 설명해달라는 요구다. 다른 한편으로는 전략적 차원의 질문으로, 보수당 집권으로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좁은 상황에서 웨일스 민족주의가 사회 개혁에 유용한 돌파구가 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드레이크포드는 노동당의 기본 입장을 견지, 민족주의는 "본질적으로 우파의 신념이다"고 말하며 민족주의와 거리를 뒀다. 민족주의 작동 방식이 누군가와 차별점을 강조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인 및 강화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14살 때 "민족주의자냐 아니면 사회주의자냐"라는 기로에 섰을때 "사회주의로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공존하기 어렵다는 그의 발언은 물론 오류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민족주의+사회주의 형태가 독일 나치즘(국가 사회주의, national socialism)이고 또 식민지에서 사회주의는 민족주의와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 영국 노동당도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를 민족주의보다 우위에 놓고 민족주의를 경계할 뿐, 영국적 정체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BBC 질문이 가진 두 번째 함의, 전략적 측면에서의 민족주의 유용성에 대한 질문은 드레이크포드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적 조건이다. 웨일스 민족주의를 우파의 신념으로 돌려 놓았을 때 그가 입을 정치적 손실은 막대하다. 웨일스 내에서 웨일스당에 밀릴 위험은 물론이고 그리고 웨스트민스터(의회)와 협상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자산을 내버리는 치명적 실수가 될 수 있다. 때문에 드레이크포드는 사회주의자로서 웨일스 민족주의를 끌어안을 수 있는 새로운 정의, 다시 말하면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제거된 개념이 필요했다.
그로부터 약 7개월 뒤 드레이크포드가 내놓은 답은 자치주의였다. 웨일스 민족주의를 웨스트민스터에 도전하는 힘이 아닌, 영국 연합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권한을 확장하려는 의지로 해석한 것이다.
이같은 인식은 2021년 1월 14일에 등장한다. 드레이크포드는 영국 연합이 "실재적 위험"에 놓여 있다고 경고하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급진적으로 재편성"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실재적 위험이란 스코틀랜드와 웨일스에서 성장하는 독립을 향한 의지다. 그는 이 문제를 단순히 "연합주의 혹은 민족주의" 양자 택일의 문제로 치환하지 말고 "새로운 연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BBC)
새로운 연합이란,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는 국방, 경제, 외교에 대한 결정을 맡고 그 외의 부분은 웨일스가 고유 권한을 갖는 관계를 의미한다. 자치권이 충분히 주어졌을 때 웨일스-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는 "머물라고 명령받은 이들이 아니라 머물기를 원"할 것이고, 이와 같은 "자발적 연합"이 이상적인 영국이라고 주장했다.
지방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 5월 8일, 드레이크포드는 자발적 연합을 재시사한다. 이번에는 "건물 꼭대기에서 유니언잭을 휘날리는 방식 말고, 4개의 의회에게 주권이 분할됐음을 인정하는 관계"로 언급, 주권 분할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주권 분할은 보수당의 신경을 건드렸다. 5월 12일, 보수당쪽의 헨리 힐(Henry Hill)은 잡지 <스펙테이터>(The Spectator, 1828~)에 웨일스 노동당을 "트로이의 용"에 비유한다(용은 웨일스의 상징, 유니콘은 스코틀랜드 상징이다). 트로이의 용이란, 드레이크포드가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웨일스-북아일랜드의 화합을 바라는 것 같지만, 주권을 공유하자는 요구는 웨일스의 진심이 독립에 있음을 명시한다고 했다. 그는 주권은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웨스트민스터만이 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요약하면, 드레이크포드는 웨일스의 민족주의를 노동당의 가치와 양립되도록 자치주의로 전환시킨 후 "자발적 연합"이란 개념으로 보리스 존슨을 압박하며 기본소득제까지 밀고 나가려고 한다.
드레이크포드의 개혁 구상이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허점이 많지만 정치 무대에서 대단히 강한 보리스 존슨과 칼자루를 쥔 웨스트민스터를 넘어야 한다. BBC 웨일스 정치 기자 데이비드 딘스는 드레이크포드의 구상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노동당 대표 스타머가 이 안을 받고 선거에서 승리, 웨스트민스터를 차지해야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웨일스의 꿈을 담은 개혁안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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