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경찰서 투탄 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의 친구들 42(최종회)
[이병길 기자]
▲ 오택 감옥 출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 그의 기록이 없었다면 박재혁의 삶은 여백 그 자체였다. 사진 제공 오택의 외손자 박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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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택(오재영)은 박재혁의 삶을 가장 많이 기록한 친구이다. 오택이 없었다면 박재혁의 삶은 9할이 여백이었다. 그의 기록도 박재혁의 죽음 이후 몇 줄로 정리되었다. 그만큼 그의 삶에 박재혁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복심 재판을 청구하여 대구 감옥으로 이감한 것도 오택이 수감 중인 박재혁을 만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박재혁은 그의 체포 직후 순국하여 상봉의 기회는 없었다.
▲ 오재영의 묘 서울 망우리 공동묘지에 있는 오재영의 묘 인근에 이중섭의 묘도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안내판과 함께 연보비도 조성해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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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시대일보 부산지국을 경영하면서 상애회(想愛會)와 보천교(普天敎) 타도 운동을 하였다. 상애회는 일제 지배층의 조선인 노동자 예속 압박정책의 철저한 주구로서 노동자를 학대한 폭력·착취 기관이었다. 또 보천교 교주 차경석은 종교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정무총감과 내각총리대신에게 친일사절을 파견하는 한편, <시국대동단 時局大同團>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전 국토를 순회하면서 보천교의 소개와 함께 대동아단결(大東亞團結)을 강조하는 친일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두 단체에 대한 반대 운동을 한 것이다.
1925년에는 조선일보 부산지국을 경영하였고 낙동강 수해를 구제하고 11월에는 라디오로 경남북을 순회하였다. 1926년 소작 개선 동정개선(洞政改善) 계몽운동을, 1927년 신간회 부산지회가 창립되자 선전부·조사연구부·서무부의 부원과 간사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28년 조선일보 지국 경영 및 신간회 상무에 취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29년부터 부산 대창동에 일본으로 가려는 노동 동포를 위하여 대중 숙박소를 설치하고 여비 없는 자에게 주식(酒食)을 대접했다. 1931년 서울로 이사하여 생활하였다. 1932년 중앙일보 광주지국장과 목포지국장을 지낸 듯하다.
1941년 경기도 경찰부에 구속당했다. 관련자는 김범부(2대 국회의원), 최천택, 최윤동(대한독립군의용대, 신간회 대구지회장, 제헌 국회의원), 노기용(2대 국회의원), 성학구(成鶴九)였다.
1945년 9월 초 해방을 맞이하자 다양한 정당들이 출현하여 이를 통합하기 위한 정당통일기성회(政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하여 이갑성(李甲成)·명제세(明濟世)·김성숙(金成淑)·박문희(朴文喜)·이극로(李克魯)·임화(林和) 등과 활동하는 한편, 양모환(梁模煥)·김진(金辰)과 함께 『독립신문』을 창간하였으나, 재정난으로 이듬해 2월 11일 종간호를 내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측에 양도하였다.
『독립신문』은 중경 임정에서 발행되던 '『독립신문』을 1946년 12월 27일 다시 국내에서 속간하였다. 편찬 겸 발행인이던 김승학이 주도했고 발행인은 박종상이었다. 사장은 1947년 5월 중순 이시영이 사장으로 되어있지만, 1947년 8월 26일에는 조완구로 바뀐다. 창간호에는 김구와 이시영, 조소앙의 창간 축하 친필을 게재하고 창간사에서 "독립을 방해하는 일체의 반동과 싸울 것이며 독립을 위해 싸우는 동지의 입과 귀가 되겠다."라고 하였다.
▲ 시대일보 지사장 시절의 최천택 일제 강점 때부터 해방 이후 최천택은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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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천택(崔天澤, 1896~1962)은 일제 강점기 내내 일제에 항거하며 살았다. 박재혁 의거 이후 최천택은 1923년 7월경 의열단원(義烈團員)인 강일(姜逸)을 만나 신임장(信任狀)·협박문(脅迫文)·관공리사직권고문(官公吏辭職勸告文)·의열단선전문(義烈團宣傳文) 등을 받고 군자금 모금을 위해 활동하였다. 1924년 12월 26일경에 그가 한때 근무했었던 합천에 자신이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군자금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일로 인해 체포되었다.
최천택은 부산지방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및 사회운동에 참여하였다. 1924년 11월경 부산청년회 주최로 열린 조선기근구제의연회에서 동정연설(同情演說)을 하였다. 또한 1925년 12월에 열린 부산청년연맹발기준비회에 참가하였고, 며칠 후에 열린 부산 청년연맹 집행위원회에서 서무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7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설립총회에서 준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어서 신간회 부산지회가 결성되자 최천택은 서무부를 담당하였다. 1927년 12월에 신간회 부산지회 임원이 개선되었는데, 이때 최천택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2월에 열린 신간회 부산지회 정기대회에서 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최천택은 항상 고등계 형사가 어느 곳이나 미행을 하고 부산 제일 위험인물로 낙인이 찍혀 크고 작게 54회나 검거・투옥을 당하고, 고문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가사와 개인적인 안일에 시간을 소비하는 일이 없었다. 최천택은 부산청년회 활동을 하고, 언론인으로 1924년 4월 18일 시대일보 기자로 있으며 기자단을 조직하였고, 1930년 4월 경남기자동맹의 시사연구부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남한은 미군의 지배를 받았다. 미군정기는 식민지배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역사적 가능성이 펼쳐지는 가운데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념과 주장들이 전개되면서 정치투쟁이 펼쳐졌던 시기였다. 미군정은 좌익을 탄압하고 우익을 두둔하는 시대였다. 민주중보는 중립을 표방하여 출범하였지만, 미군정은 좌경으로 인식하였다. 민주중보는 1947년경 다소 과장되었지만 16만 부를 발행할 정도로 규모가 큰 신문이었다. 민주중보는 지면의 내용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에 의해 여러 차례 테러를 당하였다.
최천택은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경남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고, 1947년 6월 『민주중보』 발행인 전성호(田性昊)가 사망하자 1948년 8월 17일 발행인(사장)이 되었다. 1948년 8월 최천택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축하 경상남도 대회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민주중보는 미군정기 부산 최초이자 최대의 신문이었다. 그가 경영한 민주중보는 1949년 3월 18일 지령 1천 호를 내며 사장 최천택은 "신문의 보도만을 일삼는 것이 아니다. 민중의 여론을 사회에 표면화하는 것이 신문이다. 그러니 신문이 민중의 여론을 표면화시키면 그것을 다시 민중에 반향(反響)을 주어서 민중은 그제야 자기들의 여론을 비로소 문제화시키고 그다음 행정에 시정(是正)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문의 사명은 여론을 환기하고 민중을 지도하에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당시의 민중은 여론을 사회문제화시키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했다. 1949년 민주중보 사장인 최천택은 소설가 김정한 등과 같이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에 발기위원으로 참가하였다. 1950년 2월 민주중보(民主衆報)는 제호(題號)를 민주신보(民主新報)로 이름을 바꾸고 사장에는 김희준(金禧俊)이 취임하고, 사장이었던 최천택은 편집 겸 발행인으로 취임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그는 헌병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살아났지만, 친구인 동산 김형기와 엄양준은 불귀의 객이 되었다. 김형기의 시신도 없는 가묘가 양산시 하북면 성천마을에 있다.
1956년 4월에 최천택은 대통령 선거에서 조봉암을 지지하는 진보당 경남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혁신총연맹(革新總聯盟)의 지도위원으로 활동하는 등 혁신계에서 활동하였고, 정공단 향사계(享祀契)를 조직 운영하였으며 남북평화 통일운동을 하였다. 그는 2대 독자로서 부산 시내 전답 2백 석을 상속받았으나 전부를 독립운동자 구원에 소진하였고 운명할 때는 그 부인의 구멍가게 수입으로 연명하였다.
최천택은 1961년 11월 17일 사망하였다. 최천택은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생을 마감한 토박이 항일 민족 운동가일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반독재 민주화 운동가로 활동한 부산이 자랑할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1984년 신동아에 김홍주가 쓴 "독립투사 최천택"이 논픽션 최우상을 받아 널리 알려졌다. 최천택은 2003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최천택선생추모사업회에서 선생의 항일 운동을 기리기 위해 1990년부터 동상 건립을 준비하는 위원회를 발족하였다. 그 결과 추모사업회의 자체 예산으로 2009년 3월 5일 최천택 흉상(崔天澤胸像)을 중앙 공원(현, 부산민주공원)에 건립하였다. 좌천동 옥성사(玉城寺)에 있던 묘비는 2021년 3월 부산 동구 좌천동 체육공원(증산성) 좌천1동어린이집 아래로 옮겼다. "소정최천택선생지비(蘇庭崔天澤之碑)"에는 다음 글이 적혀 있다.
▲ 최천택 기념비와 묘비석 최천택 기념비는 현재 부산민주공원에 있고, 묘비는 좌천동 체육공원에 있다. 그는 항일 민족운동가이자 반독재 민주화운동가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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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주(金永柱, 1896~1930)는 박재혁 의거 이후 부산의 청년운동과 언론활동을 하였다. 좌천동 정공단의 친구들의 삶 동선은 서로 중첩된다. 1923년 전후로 부산에서 청년 활동과 신문기자로 활동하였다. 1923년 4월 22일 부산청년회 제6회 정기총회에서 간사장은 김국태, 최천택은 총무부, 김영주는 재무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 부산진구락부 제1회 춘기대운동회 가장행렬 1920년대 부산진구락부를 중심으로 청년활동을 한 오택, 양성봉(부산시장, 경남지사), 최천택의 모습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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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6월 8일 돌연 김영주는 김한규와 함께 부산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1926년 9월에 부산기자단 월례회에 김영주는 조선일보 기자로 참석하였다. 1926년 10월 경남사회운동자대회의 준비위원회 상무위원 겸 자격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김해교육회와 김해공립농업학교기성회 사이에 분규가 발생하자 부산기자단 김영주(朝日, 조선일보)가 취재에 나섰다.
1927년 7월 16일 '부산영주구락부' 제5회 임시총회에서 조직 이름을 '부산노동청년회'로 개칭한 후 김영주, 김한규, 강대홍 외 12명을 집행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조직 이름의 변경은 단체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다. 같이 활동했던 강대홍(姜大洪, 姜大洛, 1905~1951) 이 1927년 10월 『동아일보』의 부산지국 기자로 재직하던 중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11월 고려공산청년회 경남도책, 조선공산당 경남도당 위원이 되었으며, 12월 29일 신간회 부산지회의 정치문화부원 및 중앙 대의원이 되었다. 1928년 2월 경남기자동맹 부의장이 되었으며, 경남청년연맹 창립 서면 대회에서 검사 위원을 맡았고, 1930년 6월 제3차 조선공산당 검거 사건으로 평양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김영주의 사상도 노동운동과 연관한 방향으로 전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1927년 7월 부산청년회관에서 신간회 부산지회가 준비위원 최천택의 개회선언으로 열렸다. 임시의장 김국태, 서기 김옥규, 최천택의 경과보고가 있고 난 뒤 강령규약 낭독과 축전 및 임원선거가 있었다. 회장에 김국태, 서무부에 최천택, 재정부에 김영주, 선전부에 오택, 정치부에 심두섭, 조사연구부에 백용수, 상무간사에 최천택・김한규・이강희가 선출되었다. 정공단의 친구들이 신간회 활동의 주축 인물이었다. 설립 대회 때 38명이었던 회원 수가 1928년에는 240명, 1930년에는 305명으로 증가하였다. 신간회 부산지회는 강연회를 개최해 회원과 민중들의 민족의식을 계발하거나 자연재해에 대한 구제 활동을 일상적으로 전개하였다.
▲ 김영주 표창과 위패 김영주는 국가유공자로 1996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부부 위패를 2021년 국립현충원에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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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태(金餠泰, 1899~1946)는 일제 기록에 따르면 절대독립, 민족주의자로서 과격사상을 갖고 있는 의열단원의 주요단원이다. 그의 삶은 항상 김원봉과 함께했다. 1928년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정비한 뒤, 1932년 김원봉과 함께 난징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 교관, 1934년 남경모군대연장(南京某軍隊連長), 지나모무관학교교관(支那某武官學校敎官)으로 사관생도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35년 독립운동 단체들의 통합단체인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창당에 일익을 담당하고, 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의 비서로 활동하였고,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부(韓國光復軍總司令部)에 가담해 활동하면서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하였다.
▲ 김인태와 김병태 왼쪽은 상해영사경찰에 체포된 김인태 조사서이고 오른쪽은 2021년 현충원에 모신 김병태의 위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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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태(金仁泰, 1896~??)는 김탕(金湯) 또는 김종의(金鍾意)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김병태의 형이다. 김원봉의 밀명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인 대표를 암살하려 하였으나, 거사할 권총과 실탄이 사라져서 김인태는 프랑스에서 김규식과 같이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름은 김탕(Kim T'ang)이었다.
김규식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서 1923년부터 1928년까지 시카고대학을 거쳐 뉴욕에 가서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뉴욕에서 중국식당을 개업하였다. 어릴 때 꿈꾸었던 미국행을 실행한 것이다. 1932년 중국 식당을 처분하고 일본을 거쳐 귀국하였다가 다시 1934년 1월부터 상하이에 거주하였다. 그때 상해 망지로(望志路) 212번지에 거주하는 김두봉과 약 2주 동안 같이 지냈다. 그때 동생인 김병태도 같이 있었다. 당시 아나키스트 정화암이 본 김두봉은 "독립투사라기보다는 그냥 뛰어난 한글학자였고 사상적으로는 고루하게 느껴질 정도의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늘 근심 걱정이 많았던 김두봉은 별명이 우수태산(憂愁泰山)이었다. 원래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고 자기의 주관은 확실한데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많았고 거기다가 위마저 좋지 않아 늘 병이 있었다."
▲ 왕치덕 부산 일광의원을 운영하며 임정을 후원하고 이재민을 구호하며 육영활동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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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치덕(王致德, 1898~1978)은 부유층의 장남으로 부산 사상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동구 범일동으로 이사하였다. 부산공립상업학교 재학시절 정공단 친구들과 함께 '구세단'활동을 하였고, 대구의과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좌천동에서 일광의원(日光醫院)을 운영하며 사회운동을 하였다. 쇼와 10년(1935)에 발행된 『부산명사록(釜山名士錄』에 따르면, 왕치덕은 동래군 사상면 주덕리 749에 거주하며, 명치 31년(1898) 6월 11일생으로 쇼와 2년(1927)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동년 의사 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의적(醫籍) 제767호 등록 의사면허증을 부여받았다. 쇼와 6년(1931) 5월 좌천정 317에 일광의원을 열었다. 부산지역의 신용 있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 때 의사는 한의(韓醫)는 의생(醫生), 양의(洋醫)는 의사(醫師)라고 하였다. 의사면허제도의 시행은 국가에 의해 의료의 독점권을 보장받는 대신 의료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인정하는 것이다. 조선인 의사들은 의학계 전문학교와 대학을 나온 사람들 외에 의사 시험에 합격한 검정의(檢定醫)와 일정한 지식과 실무를 갖춘 한지의(限地醫)가 있었다. 1914년에 제정된 <의사시험규칙>에 따르면, 의학교를 졸업한 사람뿐만 아니라 의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5년 이상의 경험이 있으면 의사 시험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 왕치덕은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1926년 4월에 실시한 의사시험 제2부 13명 중 한 명으로 합격하였고, 1926년 10월 의사시험 제3부에 합격하였다. 시험 합격 후 1927년 경북 도립의학강습소 제1회 졸업(총 29명)을 하였다.
후손에 따르면 병원을 운영하면서 일제의 감시와 위험을 무릅쓰고 임정에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왕치덕은 1934년 7월 대홍수로 부산 구포, 김해, 하단, 동래 지역의 이재민 구호 활동을 하였다. 1940년 부산지역에 부산중학교, 동래중학교 이외 중학교가 없어 제2중학교 설립 추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1946년 박차정의 유해를 가져온 김원봉을 집에 초대하여 지난날 독립운동의 회고담을 밤늦게 하였다. 1914년 밀양에 김원봉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한 기념사진을 남겼듯이, 이제는 김원봉을 만난 기념으로 김원봉, 오택, 김인태, 왕치덕 4명이 기념으로 사진을 촬영한 것 같다. 1947년 6월 김규식 박사 중심으로 미소공동위원회 대책 협의회를 결성하여 왕치덕, 전성호, 김지태, 박원표 등이 활동하였다. 당시 민주중보 발행인 전성호 사망하여 장례 위원으로 최천택과 왕치덕이 우인 대표를 하였다. 전성호(田性昊)는 부산진보통학교 동창생으로, 1920년대 동아일보 부산지국 기자를 거쳐 1938년 부산지국 고문이 되었다.. 해방 후 민주중보 사장을 하였고, 해방 후 귀국 동포들이 경제적 곤란으로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을 보고 구호연합회(救護聯合會)를 조직하여 동포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왕치덕은 1947년 부산부 사회교육협의회에서 활동하고, 1948년 2월 부산공민중학교를 최천택과 함께 창립하고, 1948년 정공단 향사계와 경남공립여자중학교 후원회장, 건국중학교 신축 기성회 이사, 신생활운동지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9년 한글날 준비추진 부위원장, 부산부립도서관 후원회 이사장, 부산의사회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1978년 사망하였다.
▲ 박재혁과 정공단의 친구들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박재혁, 최천택, 오재영(오택), 김영주, 왕치덕, 김인태. 그들은 아름다운 청년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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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혁의 의열 투쟁은 세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 삼일운동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서 의열단 투쟁의 첫 성과였다. 그 투쟁은 범일 좌천동 정공단 친구들이 함께했다. 독립운동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이다. 하지만 박재혁은 모든 책임을 혼자 떠안았다. 진정한 동지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친구와 동지, 조직을 절대 배신하지 않았다.
둘째, 적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부산경찰서 안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일이다. 재판에서도 드러나듯이 "조선 독립사상을 선전하고 민심을 동요시킬 목적으로 서장을 살해하기 위해 부산경찰서에 침입해서 투탄했다." 중국 고서적상 흉내를 내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인간 폭탄이 되고자 했다. 당당하게 조선 옷을 입고 뚜벅뚜벅 경찰서에 들어가 폭탄을 던진 정말 담대한 사람이었다.
셋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형선고를 받아 적의 손에 불명예스럽게 죽기보다는 단식 투쟁을 통해 자진 순국하셨다. 누구나 죽음은 두렵다. 옥중 단식 순국의 죽음은 더욱 의로운 것이다. 그는 삼대가 망하는 일보다 더한 절손의 길을 선택했다. 단식 순국은 일제를 향한 최후의 항거였다.
박재혁은 여백의 사람이었다. 오로지 그는 이름 석 자로 남아있는 사람이다. 다른 많은 독립운동가와 마찬가지로 그의 삶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 자신이 남긴 것은 단지 사진 몇 장과 최근 발견된 도장뿐이다. 초등학교, 중등학교의 기록조차 없다. 그 스스로 남긴 말 한마디 없고 단지 친구들의 기록뿐이다. 후손들도 그의 삶에 대해 말한 것이 없다. 어쩌면 그의 삶의 9할이 여백투성이다. 기록도 없기에 적을 것조차 없다. 박재혁의 삶은 다른 독립운동가와 함께 채우는 삶이다.
박재혁의 의거와 순국이 100년이 되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삶을 제대로 조명하려 하지 않았다. 가족관계부터 행적, 그리고 순국의 날까지 제대로 그동안 오류로 점철되어있었다.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런데도 박재혁 의사는 행복하다. 그의 이름에는 "의열단원"과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라는 자랑스러운 명칭이 붙어있다. 박재혁은 오로지 행동 하나로 그의 모든 삶을 증거한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그는 사람과의 인연으로 27년을 살았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더불어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의열단원 박재혁과 정공단의 친구들이 살았던 시대는 어둠의 시간이었다. 박재혁, 최천택, 오재영, 김영주, 김인태, 김병태, 왕치덕 그들은 아름다운 청년들이었다. 그들의 청춘은 빛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민족에게는 빛이 없는 시절 그들의 삶은 어둠을 밝히려는 촛불이었다. 불을 꺼지면 다시 어둠이 온다. 또 시간은 흘러갈 것이다. 시간이 흘러 또다시 망각의 시간이 올지 모른다. 100년이 지났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그저 잊고 있었다. 그렇게 역사는 한 줄로 남아있지만, 그 역사에 살았던 투쟁적 인간의 삶은 또 잊혀질 가능성이 크다. 우린 그렇게 살아온 적이 많았다. 기념의 그때가 지나면 잊기 때문이다.
박재혁의 삶에 많은 독립운동가가 스쳐 갔다. 그들의 삶도 역시 여백이 많다. 그들의 삶을 기록을 찾아서 채우고 싶었다. 여백으로 남은, 기록이 적은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의 독립은, 민족해방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해야 한다. 전쟁터에서 장군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만, 병사들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다. 병사 없는 장군이 어디 있겠는가. 독립운동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무수한 병사들이 있다. 그런 독립운동가들을 더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이름 석 자라도 남긴 그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시간이 흘러 100년이 지나고 나니 후손들도 독립운동가 조상의 흔적을 알지 못한다. 작은 기록으로 청실홍실 엮어 그 이름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독립운동사를 쓰고 싶었다. 이름만 있고 누구도 정리하지 않아 단 한 줄로도 기록되지 않는 독립운동가들이 있다. 또 많은 부분이 여백으로 가득한 인물들이 있다. 박재혁의 친구들과 인연이 있었던 사람들의 기록을 여기에 남김에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히고 사라져간다. 빛은 점점 희미하여 마침내 꺼지고 만다. 민족해방 투쟁 과정에서, 독립운동 과정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사라졌다. 희미한 사람들의 삶을 여기 조금이라도 되살리려고 하였다. 그들의 삶과 죽음 앞에 바치는 작은 꽃 한 송이다. 민족해방투사들, 독립운동가들은 척박한 이 나라 역사의 땅에 피어나 나라를 되살린 꽃들이다.
그동안 연재에 도움을 주신 박재혁, 오재영, 최천택, 김영주, 김인태, 김병태 등 독립운동가 후손과 개성고등학교 동창회, 박재혁기념사업회, 그리고 참고한 많은 논문과 저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끝)
*이병길 : 경남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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