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대회 참가자들 옷에 새겨진 문구, 그들은 용감했다 [이봉렬 in 싱가포르]
[이봉렬 기자]
5월 16일, 미국 플로리다 주의 한 호텔에서 제69회 미스 유니버스 대회가 열렸습니다. 본선을 앞두고 열린 각국의 전통 의상쇼가 펼쳐지는 가운데 예년에는 볼 수 없었던 특별한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전통 복장을 한 미얀마 대표의 손에 "Pray for Myanmar(미얀마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라고 적힌 팻말이 들려 있었습니다. 지난 3월 열린 미스 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에서 미얀마 대표가 미얀마 군부의 만행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미얀마에 대한 국제적 관심과 협조를 요청하는 퍼포먼스였습니다.
▲ 제 69회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여한 싱가포르 대표의 옷에 "STOP ASIAN HATE"라는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
ⓒ 대회 유튜브 화면 갈무리 |
대자보 퍼포먼스
싱가포르 대표가 그런 문구를 적고 나온 이유는 다 아는 것처럼 서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계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폭력 때문입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나서서 아시안 혐오 범죄에 대응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고 예산도 투입하겠다고 했지만,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이나 호주에서도 이러한 혐오 범죄가 날로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싱가포르에서도 이러한 혐오범죄의 피해자가 여럿 나왔습니다. 코로나19 확산 초기인 작년 2월 영국 런던에서는 영국인 학생 세 명이 싱가포르 출신 남학생 한 명을 둘러싸고 무차별 폭행을 저질렀습니다. 같은 해 4월에는 호주 멜버른에서 유학 중인 싱가포르 여학생이 포함 된 여성 2명이 인종차별 발언과 함께 폭행을 당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가 SNS 등으로 피해를 알리고 싱가포르 정부가 적극 대응을 하여 범인이 기소되고, 영국 사건의 경우에는 올 해 1월 재판이 열려 미성년자인 가해자들에게 1년 6개월의 재활 명령이 내려지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는 중국계(74%), 말레이계(13%), 인도계(9%)가 어울려 사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종교도 다양해서 인종이나 민족과 관련된 문제에는 특히 민감한 나라입니다. 자국민이 해외에서 당한 차별적 범죄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대책을 세우는 편입니다. 미인대회에 참여한 여러 아시아 국가 대표들 가운데 싱가포르 대표가 먼저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멈추라(STOP ASIAN HATE)"는 구호를 외친 것도 그런 배경에서 나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폭행 사건에서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만이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는 사건이 바로 싱가포르에서 발생했습니다.
지난 5월 7일 싱가포르의 인도계 50대 여성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30대 남성에게 인종차별적 발언과 함께 폭행을 당했습니다. 최근 싱가포르에서는 코로나 확진자가 갑자기 크게 늘어나자 그 이유를 인도에서 온 변이바이러스 때문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인도계 시민들을 향해 혐오 감정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는데 그게 결국 폭행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미국의 혐오범죄, 싱가포르의 혐오범죄
중국계가 다수이긴 해도 다민족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인정하고 민족 간의 화합을 국정 최우선 순위로 강조하던 싱가포르로서는 자칫 잘못했다간 심각한 내부 분열을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사건이 발생한 것입니다.
▲ 인종차별적 발언과 폭행이 있었다는 뉴스에 리셴룽 총리가 "매우 실망하고 유감"이라는 게시물을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
ⓒ 리셴룽 총리 페이스북 갈무리 |
폭행 이후 도망을 갔던 30대 남성은 총리의 발언 이후 바로 체포되었고 지금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범인에 대한 처벌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계기로 싱가포르에 여전히 실재하고 있는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더 많은 논의와 대책이 있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에만 있는 줄 알았던 혐오범죄가 피해 당사자인 줄만 알았던 싱가포르 안에서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차별과 혐오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게 평소에는 드러나지 않다가 코로나 같은 큰 사회적 재앙이 닥쳤을 때 특정 세력을 제물로 삼아 책임을 전가하는 형태로 나타나는 겁니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대상으로 하는 건 물론이고, 동양에서도 이 민족이 또 다른 민족을 대상으로, 같은 민족 안에서도 사소한 차이를 끄집어내어 약자와 소수를 향해 끊임없이 차별을 시도합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코로나 발생 초기에 특정 국가를, 특정 지역을, 혹은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쏟아졌던 혐오의 언어들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그런 언어들을 방치하거나 부추긴 결과가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혐오를 바탕으로 한 폭력행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싱가포르 미인 대표의 옷에 새겨진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를 멈추라"는 구호는 물론 유효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전염된 또 다른 혐오는 없는지도 돌아봐야 합니다. 혐오는 코로나보다 더 위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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