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하는 사람은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은 곳"
[조우성 기자]
▲ 미륵원과 관동묘려 사이의 대청호에서. 사진 속 인물은 예술공연단체 비상지악무의 이수현 단장. |
ⓒ 조우성 |
오늘은 대청호 오백리길 3구간 중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상징 미륵원(彌勒院)과 유씨 부인의 일화가 깃든 관동묘려(寬洞墓廬), 그리고 미륵원과 관동묘려 사이의 대청호 길을 소개하겠다.
미륵원의 유래는 이렇다. 고려 공민왕 때 호부전서(戶部典書, 국가 재정을 맡은 호부의 장관)를 역임한 황윤보(黃允寶, 회덕 황씨 시조)는 혼란한 정국을 피해 회덕(현 동구 마산동)으로 낙향한 뒤 굴파원(屈坡院) 혹은 귀래원(歸來院)이라 불렸던 곳을 나그네들이 묵고 갈 수 있는 사설여관인 미륵원으로 개조해 여행객들에게 무료로 숙식과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이후 황윤보의 아들 황연기(黃衍記)와 손자 황수(黃粹), 증손자 황자수(黃子厚) 등이 대를 이어 100여 년에 걸쳐 미륵원을 비영리로 운영하며 여행객들과 거처 없이 떠도는 노숙자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며 구호활동을 벌이는 등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황윤보와 그 후손들의 이런 덕행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으며, 전국에 충청도의 인심이 후덕하다고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현재 남아있는 미륵원의 모습. 정면이 남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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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륵원 호숫가에서 보이는 섬과 '명상의 정원'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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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대 발굴조사팀의 조사 보고서(1977년)에 의하면 미륵원은 동서 90m, 남북 60m로 약 1,670평에 이르는 큰 규모의 건물이었으며, 남루도 동서 4.9m, 남북 3.5m 크기로 밝혀졌다. 하지만 대전 최초의 민간사회복지시설이었던 미륵원터는 1980년 대청호에 수몰돼 현재는 그 웅장함을 볼 수 없다. 다만 재실과 남루가 지금의 장소로 일부 옮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륵원은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41호로 지정돼 있다.
미륵원(대전시 동구 냉천로152번길 80) 가는 길은 관동묘려 주차장(대전시 동구 마산동 산18-13)에 차를 세워 두고 차도를 걸어서 미륵원까지 가는 방법과 미륵원 입구에 차를 세워 두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다. 다만 미륵원 입구는 차를 세워두기가 조금 협소해서 불편한 점이 있을 수 있다.
미륵원 입구 철문은 막혀있고, 왼편에는 미륵원지 유래비와 문화재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철문 좌측의 열린 공간으로 들어가면 왼쪽에 회덕황씨 선조묘들이 있고,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미륵원이 나온다. 건물입구에 삼성문(三省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고, 대문은 없다.
건물 정면에는 황윤보의 13대손인 황경식 육애수 부부가 최근까지 살았다고 하는 집이 있고, 우측에는 남루라 적힌 건물이 보인다. 남루는 원래 2층 누각형태로 지었다고 하는데, 현재 남아있는 기와와 단청, 대들보 등을 통해 이전의 화려했던 건물의 흔적을 조금은 느낄 수 있다.
▲ 관동묘려 전경. 사진 속 인물은 예술공연단체 '비상지악무'의 이수현 단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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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묘려 앞쪽에 가마우찌들이 집단 서식하는 일명 모자섬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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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묘려(寬洞墓廬)는 조선중기의 문신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의 어머니 고흥 유씨 부인이 문종 2년(1452) 82세로 별세하자 이곳에 장례를 지내고 그 옆에 만든 재실이다. 고종 31년(1894년)에 중수했다고 한다. 1994년 6월에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됐다.
우암 송시열이 효종 8년(1651년) 51세 때 지은 유씨부인 묘갈문에 의하면 부인은 1371년에 출생했고, 부친 준(濬)은 고려의 상서(尙書)를, 조부 방(坊)은 판관을 지냈다. 은진 송씨의 명망가였던 송명의(宋明誼)의 아들인 송극기(宋克己)와 결혼했으나 22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게 됐다. 친정부모는 당시 풍습을 따라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부인은 이를 거부하고 4살 먹은 어린 아들인 송유(宋愉)를 등에 업고 500리길을 걸어 회덕(현 대전시)에 있는 시댁을 찾아 갔다고 한다.
그러나 시부모조차 "여자가 부모의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삼종지의를 모르는 것"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자, 류씨부인이 3일 동안 울면서 "삼종지의가 등에 업힌 아이에게 있지 않습니까"라고 하소연 하자 시부모가 크게 감동해 며느리를 다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후 부인은 시부모를 모시며 아들과 손자들을 훌륭히 키워냈고, 1452년 82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백여 년이 지난 효종 4년(1653년)에 나라에서 부인에게 정려(旌閭)를 하사했다고 한다.
관동묘려(대전시 동구 냉천로152번길 291)는 주차시설이 잘 돼 있고, 조금 좁지만 가는 길도 잘 정비돼 있어 접근성이 좋은 곳이다. 건물 위쪽에서 바라 보는 대청호 풍경도 멋지고, 건물 우측에 맛집으로 알려진 은골할먼네 식당(042-274-7107, 010-6428-6836)도 있어 한번 찾아 볼만 한 곳이다. 은골할먼네 식당은 야외테이블에서 식사도 가능한데, 코로나로 인해 영업을 하지 않는 날도 있으니 식사를 하고 싶다면 미리 전화로 확인을 하고 방문하면 좋겠다.
관동묘려의 사진포인트는 성행교 다리위에서 멋지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적송이다. 여기서 인물 사진을 담으면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있겠다. 또 관동묘려 바로 앞쪽에 가마우찌가 집단 서식하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일명 모자섬이라 불린다. 이곳이 사진포인트다. 섬도 재미있게 생겼지만 새들의 배설물로 인해 소나무가 죽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듯 보이기도 하는데, 조금은 묘한 느낌을 주는 섬이다.
관동묘려에서 미륵원까지 차도를 걸어 산책하다 보면 중간 중간에 차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도 있고,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들도 보인다. 호숫가로 내려가는 길이 조금 가팔라서 위험한 곳도 있으니 만일 호숫가로 내려가고 싶다면 상당히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당국에서 일반인들이 편안하게 내려갈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서 길을 정비하고 푯말을 세워주면 좋을 것 같다.
기자와 함께 미륵원과 관동묘려, 관동묘려에서 미륵원에 이르는 차도와 호숫가를 함께 걸은 예술공연단체 '비상지악무'의 이수현 단장은 "미륵원은 충청도의 후덕한 인심이 잘 표현된 훌륭하고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관동묘려는 후손들이 큰 일을 한 남성이나 정승 판서들을 기리는 건물이 아니고 여자인 부인 유씨를 받드는 재실이라는 것에 놀랐다. 훌륭한 선조밑에 훌륭한 자손들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청호는 물도 너무 맑고, 주변 경관도 아름답고,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는 곳인 것 같다. 힐링하기 더 없이 좋은 장소다. 글 쓰는 사람은 글이 절로 나올 것 같고, 노래하는 사람은 노래가 절로 나올 것 같고, 악기하는 사람은 악기 한자락 타고 싶어 할 것 같다. 자주 오고 싶은 곳이다"라고 처음 와 본 대청호의 느낌을 이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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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대청호는 기상변화와 대청댐의 수위조절 등에 따라 변화가 많은 곳이다. 어느 때 대청호에 가 본 곳이 기자가 찍은 사진모습과 다를 수도 있다. 이런 점 충분히 고려해서 여행하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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