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골 송연한 살인사건도 수다로 풀어낸다..'범죄 예능'의 시대

유성운 2021. 5. 1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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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테인먼트 형식 범죄 예능 인기
"범죄에 대한 관심 어느때보다 높아"
"사건을 다루는 의미와 가치 입증해야"
tvN '알쓸범잡' [사진 CJ ENM]

"아버지가 5살짜리 아이를 목검으로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인데요." (정재민 법무심의관)
〈자료 화면-사건 관련 뉴스 영상〉
"아이의 친모는 이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했나요? (윤종신)
"엄마도 구타를 당해서 보호소로 갔고…" (정재민)
"부인도 폭력을 당하고 아이도 당했잖아요. 차라리 아이라는 희생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엄마로서 하기 힘든 생각이지만…" (박지선 범죄심리학자)

마치 카페에서 지인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듯 대화가 이어진다. 아동 학대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범죄의 잔혹성에 대한 성토보다는 사건에 대한 이해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4월 시작한 tvN 새 예능프로그램 '알아두면 쓸데 있는 범죄 잡학 사전-알쓸범잡'의 일부다. 제목에서 추측할 수 있듯 tvN의 대표적 인포테인먼트(인포메이션+엔터테인먼트) 예능인 '알쓸신잡'의 범죄 버전이다.
범죄가 예능 시대의 새로운 소재로 떠오르고 있다. '알쓸범잡' 외에도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당신이 혹하는 사이' 등 범죄 예능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다.

범죄물은 흥미와 자극성이라는 요소 때문에 일찌감치 방송계의 주목을 받았다. MBC '수사반장'과 KBS '형사25시'처럼 실제 범죄를 모티브로 만든 형사 드라마가 대표적. MBC '경찰청 사람들'은 범죄 사건을 재연하면서 담당 경찰관이 출연하는 방식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SBS '그것이 알고 싶다'나 MBC 'PD수첩'처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사건을 추적하는 교양 프로그램도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는 중이다.

MBC 드라마 '수사반장' [자료 MBC]

최근 등장한 범죄 예능프로그램은 기존 범죄물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윤종신, 송은이, 봉태규, 장도연, 권일용 프로파일러, 장항준 감독, 박지은 범죄심리학자, 정재민 법무심의관 등 대중적 인지도 높은 연예인과 범죄 관련 전문가들이 함께 출연해 '토크+정보'의 구성으로 짜여지면서 범죄물임에도 분위기가 딱딱하거나 어둡지만은 않다. 범죄에 대한 각종 지식과 경계할만한 유의사항 등을 알려주는 전형적 '인포테인먼트'이다.
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다루는 사건들은 가볍지 않다.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이나 제주 4·3사건처럼 근현대사의 묵직한 장면부터 지존파 사건, 여대생 공기총 청부살인 사건, 연쇄살인마 유영철 사건 등 일반인들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던 범죄도 다루고 있다.

tvN '알쓸범잡' [자료 CJ ENM]

이와 같은 새로운 범죄 예능의 등장 배경으로 전문가들은 시대적 분위기를 꼽고 있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최근 층간 소음 같은 가벼운 이슈부터 아동 학대 같은 무거운 이슈까지 사회의 각종 사건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가 높다. 스스로 '수사'를 해서 댓글에 올리기도 하고, 증거 확보에 나서기도 한다"며 "예능 역시 이런 흐름에 발맞춰 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방송이 항상 뜨거운 소재를 다루는 건 교양이든 예능이든 드라마든 다 비슷한데, 요즘 범죄에 대한 대중의 시선과 관심도가 높아져 있다"면서 "아동 학대나 한강 대학생 사망 등의 사건을 보면서도 '내 주변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경각심과 함께 '내가 지켜주지 못했다'는 부채감에서 높은 관심이 기인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 안에서 찾고자 하는 또 다른 숨은 코드는 '정의'다. 법 정의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하다는 의구심이 대중에 퍼지면서 이런 콘텐트들이 높은 반향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방영 중인 드라마 '모범택시'처럼, 법 테두리를 벗어난 사적 복수에 대해서도 정서적으로 공감하게 된다는 것이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자료 SBS]

그러나 '범죄의 연성화'가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들 프로그램의 출연진들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기도 한다. '알쓸범잡'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을 찾아가는데, 일대의 풍광을 담기도 하고, 식당이나 카페에서 촬영하기 때문에 얼핏 여행 예능과 접점을 시도한 듯한 느낌도 든다.

하재근 평론가는 "'썰전'처럼 정치도 다양한 포맷으로 다뤘는데, 범죄라고 해서 그렇게 되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자칫 범죄 자체의 자극성을 이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회적으로 진지하게 다룰만한 의미가 있는 사건만을 다루고 거기서 경계할만한 메시지들을 뽑아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덕현 평론가는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는 사건에 대해 간혹 음모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하게 되는데, 그런 경우는 '우리의 상상입니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 이렇게 안전장치를 만들고 전달해야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만들지 않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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