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읽기] "제발 탈락시켜 주세요"
러시아의 27세 청년 이바노프가 중국의 보이그룹 결성 프로그램인 ‘창조캠프(創造營) 2021’에 출연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지인으로부터 대회에 참가하는 일본 탤런트 두 명의 중국어 통역 겸 안내를 부탁받았다. 그가 이들을 데리고 촬영지 하이난(海南)도에 도착했을 때 제작진은 그 또한 함께 출전하라는 뜻밖의 제안을 했다. 중국과 일본, 러시아, 태국 등 각국 청년 90명을 모아 이들 중 11명을 뽑는 데 참가자가 적은 게 이유였다.
이바노프는 춤과 노래는 문외한이었지만 승낙했다. 중국에 유학하며 점원, 보따리상, 모델, 중국어 통역 등 여러 일을 했는데 새로운 경험이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곧 후회하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물론 휴대폰도 사용할 수 없고 격리된 장소에서 오로지 춤과 노래만 연습해야 했다. 거액의 위약금 때문에 집에 갈 수도 없었다. 캠프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은 프로그램에서 탈락하는 것.
이바노프의 예명은 일본 애니메이션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루슈’에서 따온 리루슈(利路修). 이때부터 리루슈의 기행이 시작됐다. 남들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래하고 춤출 때 리루슈는 떨어지기 위해 노래는 중얼중얼, 춤은 엉거주춤 개그에 가까웠다. 한데 탈락은커녕 중국은 그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온라인엔 매일 그에 관한 소식이 올라왔다.
2월 중순 시작된 프로그램에서 매주 탈락자가 나왔지만 리루슈의 팬은 200만으로 불어났다. 절망한 표정의 그는 “저를 사랑한다면 탈락시켜달라”고 애원했다. 인터뷰에선 “나는 춤추고 싶지 않다. 정말 피곤하다. 이번 달엔 집에 가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는 4월 말 결선에까지 ‘끌려갔다’. 결국 “우승한다 해도 데뷔할 생각이 없다”고 밝혀 최종 17위로 탈락했다. 그는 탈락자에게 주어지는 ‘F’를 “Freedom(자유)을 뜻한다”고 해석했다.
중국은 왜 리루슈에게 열광했나. 그가 2017년부터 중국 청년 세대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상(喪)문화’를 대표했기 때문이란 분석이 많다. ‘상’은 상실과 좌절을 말한다. 상문화란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각박한 사회에서 꿈을 잃은 채 판박이 삶을 사는 걸 뜻한다. 결혼도 못 하고 집은 살 엄두도 못 내며 996(오전 9시 출근, 밤 9시 퇴근, 주 6일 근무) 생활에 지친 중국의 1980~90년대 출생 청년의 처지를 가리킨다. 리루슈의 모든 게 귀찮은 듯 무표정한 얼굴이 중국 상문화의 상징으로 인식됐다는 거다. 리루슈는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 세대’를 넘어 N가지를 포기한 한국 ‘N포 세대’의 모습과 겹치기도 한다.
유상철 중국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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