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 씬을 장악한 남국의 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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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eat 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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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pes
검고 푸른 포도의 계절
봄은 의외로 과일 비수기다. 제주도에서 올라오는 귤과 만감류는 이미 끝물, 딸기는 하우스 재배로 출하 시점이 당겨져 봄엔 이미 식상한 인상을 풍긴다. 매실이 제철이기는 하나 좀처럼 생과로 즐기지 않는다. 하지만 미식가들의 탐미 정신은 멈추지 않는 법. 과일이 다채롭지 않은 계절을 틈타 아열대 지역이나 남반구에서 열심히 이국의 과일을 길어 올린다. 키위, 망고, 오렌지, 바나나 등이 제철 과일의 부재를 채운다. 그중 포도는 빨갛고, 까맣고, 푸른색의 구분을 넘어 다양한 품종으로 뜻밖에 고르는 재미를 선사한다. 탐스러운 샤인 머스캣이 선풍적 인기를 끌며 사람들이 포도 품종에 관심을 기울이자, 수입사와 유통사는 기세를 몰아 수입 포도 품종을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다른 맛을 비교하며 미식의 역치를 넓히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다종다양한 포도 품종과 맛은 미식가의 마음을 달뜨게 하고 있다. 샤인 머스캣이 띄운 프리미엄 포도 시장을 곧장 이어받은 품종은 애플청포도. 사과 맛이 난다고 애플청포도라 불리는 이 신품종 포도는 2년 전 품귀 현상을 빚으며 과일 애호가들의 마음을 애태웠다. 애플청포도의 진짜 이름은 오톰크리스피. 가을에 수확하는 청포도 중 가장 아삭아삭하다고 하여 명명됐다. 다소 비정상적일 만큼 바삭바삭한 식감에 높은 당도, 약간의 산미가 느껴지는데 막판에는 배나 매실의 과육을 씹을 때처럼 까슬까슬한 질감이 입 안에 남는다. 그런가 하면 올해는 코튼 캔디가 뜨거운 인기를 얻고 있다. 애플청포도보다 훨씬 더 달고 산미는 없다시피 하며 옅은 바닐라 향이 감돌아 이름 그대로 솜사탕 맛을 연상시킨다. 스윗사파이어는 유독 외형으로 시선을 끈다. 포도알이 검으면서 길쭉한 것이 가지를 닮아 ‘가지포도’로 불리는 스윗사파이어는 식감 역시 대체 불가능할 만큼 독특하다. 길쭉한 포도알을 슬쩍 물면, 단단하고 야문 껍질에서 이를 밀어내는 듯한 탱탱한 저항감이 느껴진다. 아래윗니로 세게 베어 물면 비로소 포도알이 반으로 톡 갈라지며 진한 단맛의 과즙이 입 안을 적신다. 올해는 코튼캔디, 스윗사파이어와 함께 블랙포도가 눈에 띈다. 블랙포도는 특정 품종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시기에 따라 수입되는 포도 품종이 지나치게 다양하다 보니 외형적으로 큰 특징이 없는 흑포도를 편의상 블랙포도라 총칭한다. 블랙포도는 껍질이 얇고 특유의 떫은맛과 씨가 없으며 당도가 높은데, 면면이 들여다보면 개별 품종마다 개성이 뚜렷하다. 개중에서 세이블 품종은 제비꽃향이 언뜻 스치는 매력적인 품종으로 알려졌다.
곰 젤리 맛 포도가 온다
해외에서는 포도를 ‘테이블 포도’라 부른다. 와인이나 주스로 가공하는 품종과 구분 짓기 위해 생과로 즐기는 포도에 수식어를 붙인 것. 와인이나 포도 주스를 즐기지만 이를 생산하지 않는 우리 입장에서는 낯선 표현이다. 아니, 당사자들도 영 어색한지 구글에 ‘테이블 포도’를 검색하면 ‘포도를 테이블 포도라고 부르는 이유’ 등의 질문이 빈번히 등장한다. 더 의아한 사실은 풍미가 관능적으로 가장 뛰어나거나 개성 있는 품종을 생과로 즐길 듯하지만, 대개 테이블 포도보다 와인용 포도의 풍미가 더 다채롭다는 것. 테이블 포도는 과육이 크고 과즙이 풍부하며 당도가 높고 신맛이 적으며 껍질이 얇고 씨가 없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다 보니, 되려 풍미의 다양성은 떨어지는 경향을 보이게 됐다. 또 포도는 전 세계에서 가장 수출입이 활발한 과일이다. 신선한 상태로 오대양을 건너기 위해 일찍이 수확하다 보니 응축된 풍미를 지니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이블 포도 중 와인용 포도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풍미가 뛰어나다고 인정받은 품종이 바로 코튼캔디와 스윗사파이어, 검드롭스다. 아직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검드롭스는 풍선껌 혹은 곰 젤리 맛이 난다. 검드롭스가 국내에 상륙하는 날, 신품종 포도의 인기는 한 차례 더 ‘떡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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