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도 요부도 대문호도.. 초상화로 '이미지 정치'

손영옥 2021. 5. 16.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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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 특별전
초상화에는 그 시대의 미술 양식이 드러날 뿐 아니라 특정한 이미지를 유포하는 정치적 행위가 숨어 있기도 하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명품 컬렉션 전시는 이런 관점에서 봐도 재미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며 세계사를 다시 쓴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1558년 스물다섯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45년간 잉글랜드를 극빈국에서 유럽 최강국으로 끌어올렸다. 통치만 잘한 게 아니라 이미지 정치에도 능했다. 초상화를 통해서다.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이 소장한 초상화 속 여왕은 당시 42세. 하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초월적인 이미지로 표현되도록 여러 장치를 쓰게 했다. 펜던트의 불사조 문양은 영원불멸의 권위를, 튜더 왕조의 상징인 장미꽃은 자신이 적통임을 세상에 웅변한다. 순결의 상징인 진주로 무수히 장식해 ‘처녀 여왕’의 이미지를 한껏 강조한다.

팝가수 에드 시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영국 국립초상화미술관 명품 컬렉션이 한국에서 처음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시 “시대의 얼굴, 셰익스피어에서 에드 시런까지”에서다. 1856년 개관한 국립초상화미술관 소장 초상화 78점이 나왔다. 통치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을 비롯해 극작가 셰익스피어(1564∼1616),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 진화론자 찰스 다윈(1809∼1882), 소설가 찰스 디킨스(1812∼1870), 최연소 노벨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24)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의 초상화를 만날 수 있다. 그 범위는 500년에 걸쳐 있다. 나무판에 그려진 유화 초상화에서 홀로그램 초상화까지 당대 최고의 기술로 그린 시대의 얼굴들이 나왔다.

흥미로운 부분은 권력과 이미지 정치다. 오늘날 사진이 그런 것처럼 초상화 역시 정치인들이 이미지를 ‘조작’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엘리자베스 1세 초상화의 뒷면을 X선으로 투과하면 젊은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눈과 코가 본래의 위치보다 위로 수정됐음을 알 수 있다.

찰스 1세의 정부인 여배우 넬 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초상화를 통한 이미지 연출은 당대의 셀럽들도 마찬가지였다. 구두쇠 스크루지 영감이 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쓴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20대에 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자신의 꽃미남 초상화를 판화로 제작해 출간하는 소설책에 넣음으로써 팬덤을 일으켰다. 17세기 영국 왕 찰스 1세(1600∼1649)의 정부였던 여배우 넬 귄(1651∼1687)도 만만찮았다. 빈민 출신인 그녀는 화가들이 섹슈얼한 이미지로 자신을 그리게 함으로써 뭇 남성을 울렸고 마침내 왕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브론테 자매의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영국판 명예의 전당이라 할 수 있는 국립초상화미술관의 초상화 수집 기준은 어떠했을까. 처음엔 각 분야에서 탁월한 성취를 이루고 사회에 공헌한 인물들이 선정됐다. 그러나 주류 사회의 편견이 깔려있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21세기 들어서는 사회의 소수자도 포함한다. 이를테면 ‘흑인 나이팅게일’로 불린 간호사 메리 시콜(1805∼1881)의 초상화는 당대에 이 미술관에 입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뀜에 따라 뒤늦게 미술관에 걸렸다. 여성 참정권 운동가였던 화가 루이스 조플링(1843∼1933)이 이곳에 입성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여성도 남성 누드모델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 당대 미술계에 파문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그런 훈련을 받아야 인기 장르인 역사화를 그릴 수 있었지만, 여성은 그런 기회에서 배제됐다. 오랫동안 천장에 구겨진 채 처박혀 있다 나온 소설가 샤롯 브론테(1816∼1855)·에밀리 브론테(1818∼1848) 자매의 초상화는 눈물겹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찰리와 함께한 자화상'.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있다. 1960년대 세계적인 영국 록 밴드 비틀스와 오늘날 세계적인 영국 팝가수 에드 시런(30), 당대 최고의 배우 오드리 헵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정치 숙적 올리버 크롬웰(1599∼1658)과 찰스 1세 등이 그런 예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페테르 파울 루벤스(1577∼1640), 초상화의 대가 조슈아 레이놀즈(1723∼1792), 빛의 화가 존 컨스터블(1776∼1837), 20세기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21세기인 오늘날 상한가를 치는 데이비드 호크니(84) 등 세계 회화사 거장들의 작품도 나왔다. 금박 액자에 걸린 고전주의 초상화만 나왔다면 자칫 단조로울 수 있지만, 시대가 바뀌며 양식도 달라진 다양한 초상화가 나와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바로크에서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팝아트 등 회화사의 맥락에서 초상화 제작기법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볼 좋은 기회다. 전시 공간은 크지 않지만 ‘명성’ ‘권력’ ‘사랑과 상실’ ‘혁신’ ‘정체성과 자화상’이라는 다섯 주제로 구성해 밀도가 높다. 8월 15일까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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