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최측근에서 사형수로, 공안사건으로 몰락한 남자
[김종성 기자]
MBN 주말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에서 광해군 가족에게 묵직한 두려움을 주는 인물이 있다. 상궁 김개시(송선미 분)와 더불어 광해군(김태우 분)의 최측근이자 정권 실세로 나오는 이이첨(이재용 분)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가상의 스토리이기는 하지만, <보쌈> 속의 이이첨은 며느리인 수경(권유리 분)을 죽이고자 사병 부대까지 동원한다. 광해군의 옹주인 수경이 보쌈으로 인해 실종된 사실을 은폐하고자 거짓 장례식을 치른 그는 자신의 거짓을 은폐하고자 수경을 죽이려 한다. 임금의 최측근 신하가 임금의 딸을 죽이려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작가의 상상력에서 나온 이야기다.
드라마 속의 광해군은 그런 이이첨을 신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계한다. 이이첨이 수경에게 저지른 일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다. 경호실장인 내금위장(서범식 분)을 은밀히 불러 이이첨의 범행 증거를 확보해두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이이첨에게 의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약점을 찾고 있는 것이다.
역사 속 인물을 판단할 때는 사망 연도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의 족적을 남기는 사람은 역사적 사건의 와중에 세상을 떠날 확률이 크기 때문에, 이런 인물의 사망 연도는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될 수 있다.
▲ MBN 주말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 MBN |
이이첨은 의적이나 반체제 단체의 성격을 띤 임꺽정 부대가 한성부에서 출몰하고 문정왕후가 아들 명종을 대신해 실권을 행사하던 1560년, 충청도 음성군에서 출생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시점은 그로부터 63년 뒤인 1623년이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음력으로 광해군 15년 3월 14일(양력 1623년 4월 13일)이 그가 눈을 감은 날이다.
이날은 인조 쿠데타(인조반정)로 광해군 정권이 붕괴된 지 2일 뒤였다. 그리고 인조가 임금이 된 다음날이었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날 이이첨은 사형을 당했다. 광해군은 이로부터 18년 뒤인 1641년에 눈을 감게 되지만, 광해군 정권의 몰락과 함께 인생이 끝난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이이첨은 이 정권과 명운을 함께하는 인물이었다.
사망 연도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이첨(1560~1623)은 광해군에게 상당히 든든한 존재였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아버지인 선조에게도 한때 그런 존재였다. 선조와 광해군의 부자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는 선조에게도 믿음직한 신하였다.
세조(수양대군)의 무덤인 광릉에서 종9품 참봉으로 근무하던 이이첨이 선조의 신임을 받게 된 것은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세조의 어진을 목숨을 걸고 지켰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광릉에 불을 지르자 그는 불길 속에서도 영정을 들고 뛰었다. 도주 과정에서 일본군을 두 차례 만났는데도 악착 같이 영정을 사수했다. 그런 뒤 북쪽으로 피난 중인 선조를 찾아가 어진을 바쳤다. 선조는 그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건국 200주년인 1592년까지 조(祖)라는 묘호(사당 칭호)를 받은 군주는 태조와 세조밖에 없었다. '조'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 군주에게 부여됐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세조의 이미지가 그다지 좋지 않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성계 다음가는 군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런 세조의 어진을 목숨을 걸고 지켰으니 선조의 신임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22세 때인 1582년에 과거시험 1단계인 소과에 급제한 상태에서 광릉참봉으로 일하던 이이첨은 그 일이 있은 뒤인 1594년에 대과 급제에 성공했다. 선조 정권의 중추세력이자 개혁세력인 사림파(유림파)를 탄압한 이극돈의 5대손이기 때문에 출세의 제약을 받고 있었던 이이첨의 삶은 임진왜란 발발과 함께 이처럼 확 바뀌게 됐다.
그 뒤 이이첨은 선조에 대한 충성심을 광해군에게도 발휘했다. 광해군의 측근이 된 그는 광해군이 아버지와의 불화 속에서도 무사히 왕위를 이어받고, 왕이 된 뒤에는 다수파의 압력으로부터 왕위를 무사히 지켜낼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그래서 그는 광해군에게도 든든한 신하였다.
하지만, 그의 존재는 광해군 정권의 어두운 측면이 됐다. 이 시대는 오늘날 우리에게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와 개혁 정치의 시대로 각인돼 있지만, 이 시대에도 당연히 명(明)뿐 아니라 암(暗)도 있었다. 광해군 정권은 소수파라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정적 숙청을 자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심케 할 만한 공안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다. 이 같은 부정적 측면을 담당한 인물이 바로 이이첨이었다.
이이첨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정치공학 담당자 같았다. 일반 형사사건처럼 보일 수 있는 것도 그의 손이 닿으면 역모사건이 됐다. '칠서의 옥(獄)' 혹은 '칠서지옥'으로 불리는 사건도 그중 하나다. 일곱 서얼이 관련된 이 옥사(獄事, 중대 사건)에 관한 포도대장의 보고는 이랬다.
"지난달 중에 조령 길에서 도적이 행상을 겁탈한 뒤 은자 수백 냥을 탈취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광해군 5년 4월 25일자(1613년 6월 13일자) <광해군일기>.
충북과 경북을 잇는 조령(새재) 고개에서 발생한 이 일은 외형상 강도 사건처럼 보였다. 이런 사건을 이이첨은 정치적 사건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사건 가담자로부터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선조 임금의 적장자로서 광해군보다 혈통상 유리했던 영창대군의 입지를 위협하는 방향으로 사건이 진화됐던 것이다.
이이첨은 칠서의 옥 외에 김직재 옥사나 경운궁 투서 사건 같은 것도 주도적으로 해결했다. 이를 통해 광해군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세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자신의 정권 내 입지를 공고히 해나갔다. 불길을 뚫고 세조 어진을 들고 뛸 때처럼 광해군 정권을 지켜내고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 MBN 주말 사극 <보쌈 - 운명을 훔치다> 한 장면. |
ⓒ MBN |
이이첨이 주도한, 진짜인지 아닌지 불명확한 역모사건들에 힘입어 광해군 정권은 잠재적 위협 요인들을 제거해 나갔다. 자파 세력을 불리기보다는 상대편을 죽이는 방식으로 소수파 정권의 한계에 대처해 나갔던 것이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정권 보호에 기여했지만 장기적으로는 정반대 효과를 낳았다. 정권의 윤리적 기반을 침식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던 것이다.
이이첨의 방식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이자 광해군의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임금의 가족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광해군을 효심과 우애 없는 군주로 만들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표현에서 나타나듯이 '국가는 가정의 연장'이라는 관념이 지배했던 시대다. 이런 시대에 이이첨은 결과적으로 '가족질서를 파괴하는 광해군'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이는 광해군의 국가경영 능력에 대한 의심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됐다. 이것은 광해군의 윤리적 자질에 대한 평가가 떨어지고 쿠데타 세력이 동조자들을 쉽게 규합하는 결과로 연결됐다.
이이첨은 광해군 정권을 지키고자 애쓴, 충신이라면 충신이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권을 지킨다는 일념 하에 공안정국을 자주 조성하고 정적들을 처형대에 세웠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정권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상대 진영의 세를 불려주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간신이란 평가를 받아도 과하지 않았다. 충신이랄 수도 있고 간신이랄 수도 있는, 양면성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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