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추모 행사 언제까지 할지' 묻는 이들에게 [아이들은 나의 스승]
[서부원 기자]
▲ 학생회가 주도하여 5.18 웹툰 <망월>을 전교생이 읽은 뒤, 인상 깊은 대목을 각자 스케치해 벽에 걸어두었다. 교내 추모 행사의 일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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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찾아온 오월. 41주년 5.18 추모 행사 준비로 학교마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여전히 코로나 와중이라 행사가 취소되거나 대폭 축소해 진행될 예정이다. 5.18 묘역 방문이나 음악회 등은 올해도 힘들게 됐다. 자칫 진상 규명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잦아들까 걱정된다.
제주 4.3과 여순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 국가 폭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 학살을 숱하게 겪은 우리 현대사에서 기실 광주는 '복 받은' 도시다. 희생자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명예가 회복됐고, 국립묘지에 안장됐으니 말이다. 다른 사건의 유족들에게는 외려 부러움의 대상이 됐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5.18 진상조사위원회가 활동 중이라는 걸 잘 모른다. 고작 당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사실과 해당 발포 명령자만 규명하면 마무리되는 걸로 안다. 당시 행불자 76명은 아직 시신 수습은커녕 행방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아는 이가 드물다.
사람들은 5.18의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는 이유만으로 문제가 모두 해결된 줄로 아는 거다. "언제까지 5.18에 연연할 거냐"며 불만을 늘어놓는 강퍅한 아이들도 더러 있다. 따지고 보면, "언제까지 세월호를 우려먹을 거냐"고 조롱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그들의 미래일지도 모른다.
"선생님, 지금 준비하고 있는 5.18 추모 행사는 언제까지 계속하게 될까요? 진상이 규명될 때까지? 전두환이 처벌될 때까지? 그도 아니면, 유족들이 모두 돌아가실 때까지?"
한 아이의 뜬금없는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이라서다. 그는 결단코 행사 준비가 귀찮거나 5.18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라고 했다. 언제부턴가 추모 행사가 관행처럼 여겨지고 형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라고 했다.
해마다 뻔한 행사와 수업이 조금은 지겹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생인 지금까지 관련 영상을 보고, 분향소 참배하고, 점심시간에 주먹밥 먹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듣는 것까지 '5.18 행사 공식'이라고 표현했다. 기억은 하겠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다는 거다.
▲ 이곳 광주에서는 정규 교육과정으로 채택해 <5.18 교과서>를 활용하는 학교가 있다. 사진은 <5.18 교과서> 내용의 일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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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행사는커녕 학교에서 계기 수업조차 꺼리는 다른 지역에서 본다면 배부른 소리다. 광주는 5.18 교과서가 별도로 제작되었고, 교육과정에 정식 과목으로 채택된 학교도 있다. 학교마다 5.18 동아리를 운영하도록 하는 등 교육청의 적극적인 관심과 노력도 높이 살 만하다.
필자가 근무하는 학교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인 윤상원 열사와 김평용 학생 희생자의 모교로서 더욱 다양한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해마다 5.18 추모 주간을 지정하여, 현관 중앙 로비에 분향소를 설치하고, 사진전과 추모 음악회를 열어 5.18의 정신을 기려왔다.
이러한 노력에도 아이들의 가슴을 덥히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이는 5.18 추모 행사와 교육이 겉으론 다양하고 화려하지만, 내실이 부족하다는 뜻이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피해 배상과 명예 회복의 과정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미래세대를 위한 교육일 텐데 말이다.
계기 수업을 준비해야 하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 아이의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아서다. 하마터면 작년에 써먹었던 영상을 그대로 보여줄 뻔했다. 같은 자료라도 다른 아이들이니 새롭게 여길 거라는 건 오산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이미 본 내용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5.18의 배경과 전개 과정, 역사적 의미에 대해 강의하는 것도 뭣하다. 이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을 테니 기껏해야 복습으로 받아들이면 다행이다. 이팔청춘 고등학생에 걸맞게 그들의 심장을 뛰게 할 수 있는 5.18 교육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며칠 동안 5.18 교과서만 만지작거리다 드디어 찾아냈다. 기존의 역사 공부 대신, 당시 광주 청년들의 삶을 들려주자는 것. 항쟁 지도부와 시민군에 가담한 또래의 모습에 지금 자신의 모습을 대입해 볼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다. 질문은 딱 하나. "그때 너라면 어떻게 했을까?"
이런 발문이 새삼스러울 건 없다. 다만, 먼 옛날의 사례라면, 아이들은 대번 "그땐 그랬겠죠"라며 심드렁하게 답하고 만다. 16세의 나이로 가노를 해방시키고 학교를 세운 김좌진이나, 17세에 고향에 내려가 3.1 만세 시위를 주도한 유관순 등은 적절한 사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올해는 5.18 당시 고등학교 1학년생이었던 문재학과 안종필, 두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과 항쟁을 이끌었던 들불 야학의 강학(講學)들의 뜨거운 삶을 소개할까 한다. '꼰대'처럼 그들의 삶을 본받아야 한다며 다그치진 않겠다. 그저 그들이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만 전달할 것이다.
일곱 강학들
초등학교 동창생이 희생된 것을 본 뒤 시민군에 합류한 문재학 열사는 항쟁 기간 내내 희생자의 시신을 닦고 유족에게 인계하는 일을 맡았다. 안종필 열사는 시위에 나서지 말라는 부모의 손을 뿌리치고 항쟁 마지막 날까지 도청을 지켰다. 얼마 전 당시 한 외신 기자가 찍은 도청 내부 사진이 공개되어 두 고등학생 열사의 최후에 비감함을 더한다.
들불 야학을 열어 소외된 이웃과 함께한 일곱 강학들의 삶은, 굳이 5.18과 연관 짓지 않더라도 아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그들은 서로 교사가 아닌 강학으로 불렀다.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이 별개가 아니라는 뜻이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의미를 오롯이 담은 명칭이다.
고작 나이 스물에 들불이라는 이름으로 노동 야학을 설립한 박기순 열사. 야학에 헌신한 그는 1978년 겨울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떴지만, 그의 정신은 강학들이 5.18에 투신한 밑거름이 됐다. 그는 1982년 윤상원 열사와 영혼결혼식을 올렸고, 당시 축가로 만들어진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5.18 당시 나이 서른이었던 윤상원 열사는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항쟁 마지막 날까지 도청을 지키다 숨졌다. '오월을 위해 태어난 인물'로 불릴 정도로, 그는 항쟁 기간 내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화려한 휴가>는 그의 생애를 모티프로 제작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천애 고아 박용준 열사의 삶도 가슴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배움에 목말랐던 탓일까. 그의 또렷하고 정연한 글씨는 당시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데에 큰 힘이 된다. 언로가 막히고 통제된 상황에서, 투사회보는 명실공히 당시 광주에서 유일한 정론지였다. 현재 '박용준체'를 컴퓨터 폰트로 제작하기 위한 시민 모금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당시 나이 스물일곱이었던 박관현 열사는 과연 성공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성찰하게 만든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그가 야학에서 현실을 직시한 뒤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라는 기관차가 되어 광주의 민주주의를 이끌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언행일치의 삶으로 증명한 영원한 청년이다.
신영일 열사는 나이 열아홉에 서슬 퍼런 유신정권에 맞선 열혈 청년이었다. 5.18 당시 광주를 벗어나 있었다는 죄책감에 이후 80년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다. 지역의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주도하며 반독재투쟁의 선봉에는 늘 그가 있었다. 단식 투쟁의 후유증과 과로로 불과 나이 서른에 세상을 떴다.
1948년생인 김영철 열사는 가난했기에 소외된 이웃을 외면할 수 없었다. 명문 광주일고를 나왔지만, 대학 진학 대신 돈을 벌기 위해 공무원이 됐다. 비리투성이인 공직 사회를 박차고 나와 야학에 합류한 뒤 강학들과 5.18에 투신했다. 항쟁 지도부의 기획실장으로 마지막 날까지 도청을 지켰다. 체포된 뒤 모진 고문을 당해 그의 정신은 80년 당시에 멈춰 버렸다.
박효선 열사는 대전에서 태어나 전남대에 유학을 왔다. 스스로 광대라 부를 만큼 연극을 사랑했다. 연극을 가르치며 들불 야학과 인연을 맺었고, 5.18 당시 학생수습위원회 홍보부장을 맡았다.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1998년 병사할 때까지 평생을 5.18 관련 연극만 만들었다. 1984년 오월 극단 토박이를 창단한 이도 그다.
'그들의 삶'
박기순, 윤상원, 박용준, 박관현, 신영일, 김영철, 그리고 박효선 열사. 이렇게 일곱 명을 우리는 '들불 7열사'로 부른다. 생각나는 대로 적었는데, 공교롭게도 세상을 뜬 순서다. 사망 당시의 나이를 보면, 순서대로 20세, 30세, 24세, 29세, 30세, 50세, 그리고 44세에 불과하다.
나이도 삶도 죽음도 다 다르지만, 그들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 말고도 공통된 게 하나 있다. 학벌이든, 지식이든, 기술이든, 그들이 지닌 재능을 하나의 특권처럼 여기며 소외된 이웃을 위해 기꺼이 썼다는 점이다. 그들은 각자의 재능을 사회적 산물로 받아들였다.
천부적인 것도 아니고 자신의 능력으로만 얻어낸 성과물도 아니기에, 기꺼이 남을 위해 써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이 들불 야학을 열고 합류한 것도, 강학으로 명명한 것도, 죽음을 무릅쓰고 항쟁을 주도한 것도 그래서다. 이는 개인적 재능이 향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올해 나의 5.18 계기 수업은 '그들의 삶'이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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