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달 만에 사라진 또 하나의 고려 정부를 찾아서
[정명조 기자]
▲ 용장성 왕궁터 진도에 온 삼별초가 항몽의 본부로 삼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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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파 앞바다 망바위에서 바라본 벽파 앞바다다. 바다를 따라 쳐들어오는 적군을 쉽게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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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바위 선황산 꼭대기 가는 길에 있다. 둘레에서 선황신당터와 두 채의 집터가 발굴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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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장성 둘레가 13km에 달한다. 일부를 복원하여 성벽을 따라 걸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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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탐방로 3코스를 걸었다. 진도의 옛 진입로다. 삼별초군이 진도에 도착하여 용장성으로 넘어가던 길이다. 연동마을에서 출발했다. 삼별초군이 처음 와서 잠깐 머물렀던 마을이다. 서해랑길 6코스가 지나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용장성 가는 길은 잘 갖추어져 있었다. 찔레꽃 향기가 가득했다.
대투개재 네거리에 다다랐다. 오른쪽으로 오르면 망바위가 있고, 왼쪽으로 오르면 거북바위가 있다. 망바위로 발길을 돌렸다. 삼별초군이 망을 보던 바위다. 그 위에 서니 벽파 앞바다가 훤히 보였다. 바다를 따라 쳐들어오는 적군을 쉽게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때는 바다였던 곳이 간척사업으로 메꿔져 일부는 들녘이 되었다. 거북바위에 올랐다. 선황산 꼭대기 가는 길에 있다. 둘레에서 선황신당터와 두 채의 집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다시 탐방로로 돌아와 대투개골을 따라 내려왔다. 농삿길과 마을길에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용장성 왕궁터가 나타났다. 삼별초군은 이곳에 도착한 뒤, 성을 쌓고 궁궐을 지었다. 주변 섬과 육지를 공격해 터전을 넓혔다. 완도에 송징, 남해에 유존혁, 제주에 이문경을 보내 관리하였다. 진도를 황도(皇都)라 부르며 자주 정부임을 밝혔다.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 왕온 묘 삼별초가 떠받들던 왕이 여몽연합군에 쫓기다 잡혀 죽었다. 왕무덤재에 그의 무덤이 있다. 그가 탔던 말 무덤도 곁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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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녀둠벙 여몽연합군에 쫓기던 궁녀들이 몸을 던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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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급갑포 삼별초가 여몽연합군에 쫓겨 제주도로 떠난 곳이다. 앞바다에 김 채취선과 지도선이 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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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 세력이 커지자 개경 정부는 두려웠다. 1271년 5월 15일, 여몽연합군이 총공격했다. '대투개(大鬪岕)재'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고, 용장성이 무너졌다. 그 뒤 배중손 장군이 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는 이때 죽은 것으로 보인다. 김통정 장군이 새 지도자가 되어 맞섰으나 힘이 모자랐다.
왕온(王溫)도 죽었다. 몽골에 항복한 왕실에 맞서 삼별초가 모신 왕이다. 그는 삼별초를 따라 강화도에서 진도로 내려왔다. 용장성이 무너진 뒤 여몽연합군에 쫓겨 달아났다. '정거(停車)름재'에서 잠깐 숨을 돌렸다. 논수골에 이르러 몽골 장수 홍다구에게 잡혀 죽었다. '왕무덤재'에 그의 무덤이 있다. 논수골 싸움 때 피로 물든 핏기내(血川)는 '빗기내'가 되었다. 운림산방이 있는 곳이다.
궁녀들은 달아나다 둠벙에 몸을 던졌다. 둠벙은 작은 연못이다. 비 오는 날이면 둠벙에서 우는 소리가 났다고 한다. 의신면 돈지리에 '궁녀둠벙'이 있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함께 데리고 갈 수 없어 '부녀(婦女)동'에 남겨졌다. '사마(死馬)고개'에서는 몽골군이 쏜 화살에 많은 말이 죽었다.
▲ 삼별초 추모관 용장성 고려항몽충혼탑 옆에 세워졌다. 굴포 바닷가에 있던 배중손 사당의 현판과 배중손 장군 동상과 배중손장군항몽순의비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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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도진성 왜구를 막기 위해 바닷가에 쌓은 성이다. 용장성을 빼앗긴 뒤, 배중손 장군이 이곳으로 와서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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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중손 사당이 없어졌다. 굴포 바닷가에 있었다. 마을 당집이 있던 곳이었다. 굴포신당유적비와 고산윤선도선생사적비와 배중손장군항몽순의비가 세워져 있었다. 시대를 뛰어넘어, 마을 신과 고산 윤선도와 배중손 장군이 사이좋게 한 지붕 밑에 있었다. 그곳 가까이 있는 남도진성과 아울러 그럴듯한 스토리텔링이 만들어진 뒤에 생긴 일이다.
용장성을 빼앗긴 뒤 배중손 장군은 남도진성으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이곳마저 무너지고 바닷가를 따라 물러나다 굴포에서 마지막을 맞았다. 이를 바탕으로 마을 당집이 배중손 사당으로 바뀌고, 배씨 문중에서는 이곳에 동상을 세웠다. 배중손 장군은 오른손을 치켜들고 굴포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 고려항몽충혼탑 해마다 항몽순의제를 지내며 삼별초군을 추모한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열리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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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에 세워졌던 또 하나의 고려 정부는 아홉 달 만에 사라졌다. 후유증은 컸다. 몽골군에 맞섰던 사람들은 포로가 되거나 노비 신세로 전락했다. 살기 위해, 슬픔을 가슴에 묻고 가락에 몸을 맡겼다.
제주도로 건너간 삼별초는 두 해 동안 싸우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제주에서 살아남은 삼별초군이 오키나와로 건너갔다"라고 몇몇 학자가 주장했다. 오키나와 우라소에성에서 나온 수막새와 "癸酉年 高麗瓦匠造(계유년에 고려의 기와 장인이 만들다)"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를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참말이라면, 몽골에 맞섰던 삼별초는 바다 건너 먼 이국땅에 자리 잡았다. 750여 년 전, 그곳에서 새로운 문명 시대를 열었다. 성을 쌓고 국가의 틀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놀랍고, 반갑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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